히틀러가 유태인이라고?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위대한 독재자]는 2차 대전이 벌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영화다. 채플린에게 특별한 초인간적 능력이 있지 않은 한, 우리는 그가 이후 벌어질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영화를 만들었으리라 추리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채플린은 영화의 마지막을 독재자 힌켈(히틀러)로 오인된 유태인 이발사가 군중 앞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역설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은 크게 환호하고, 가족을 잃고 쓰러져 있던 유태인 소녀의 앞에는 찬란한 햇살이 비친다. 현실 세계에서 진행되던 상황과는 딴판으로, [위대한 독재자]의 결말에는 희망이 가득하다.

이제 영화-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입장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반역적인 상상을 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유태인 이발사가 연설을 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발사와 바꿔치기 당한 독재자 힌켈이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물론 채플린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고,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그저 감상적으로, 보는 이에게 감동과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족했을 게다. 하지만 채플린이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우리가 이런 류의 소급적인 상상을 해보는 것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인 게 사실이다.

가정해볼 수 있는 상황 한 가지는, 권좌에 앉은 유태인 이발사가 자신의 연설과는 달리 전임 독재자의 행적을 그대로 모방하게 되는 경우다. 그는 자신이 가짜임이 들통나는 순간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전임자가 행한 것보다도 더욱 잔혹한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다. 따라서 이후의 모든 상황은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전개된다. 2차 대전이 벌어지고, 유태인과 소수자들은 학살을 당하고, 이발사는 지하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만일 실제로 영화의 뒤안에서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면, [독재자]는 아마도 동족학살을 가장 혐오스러운 형태로 표현한 영화가 될 것이다. 물론 채플린은 이후의 일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는 가장 적절한 선에서 이야기를 중단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간 독재자 힌켈의 이야기다. 힌켈은 홀로코스트 속에서도 특유의 교활함과 야비함으로 끝끝내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다른 생존한 유태인들과 함께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 국가로 이주하며, 불타는 ‘권력에의 의지’를 활용해서 이스라엘의 중요한 지위에 오르기에 이른다. 그는 여당 의원과 주요 당직자를 거쳐 대통령 후보로까지 출마하고, 마침내 유태인 국가를 지휘하는 최고 권좌에 올라선다. 그리고 토매니아에서 하던 버릇을 못 버린 그는 새로운 적의의 대상으로 인접 팔레스타인 국가들을 지목,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 학살을 거듭하며 피에 대한 굶주림을 충족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무슬림’이 나치 인종 청소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무슬림? 이슬람 교도와 홀로코스트 간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이 말은 집단 수용소 수감자들이 동료 유태인을 가리켜 사용했던 표현이라고 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인용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의 처참한 환경 속에서 ‘인간성의 가장 본질적 양상들을 박탈당함으로써 비인간화’된 상태, ‘동물적 생명력마저 박탈당한’ ‘동물 이하의 상태’에 놓인 유태인 수감자들을 그들 스스로가 ‘무슬림’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뭔가 고약한 악취가 풍긴다. 인간 이하의 상태로 떨어진 동료 유태인들을 ‘무슬림’이라 일컫는 이 기괴한 자기비하의 바탕에는 이슬람 교도를 인간이 아닌 존재, 동물보다도 못한 ‘살아있는 시체’로 여기는 반 아랍적 인종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무슬림이 유태인 인종청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 건립 이래로 유태인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아랍인 인종청소’를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이하의 상태로 떨어진 자신들을 ‘무슬림’으로 비하했던 유태인들의 사고 메커니즘은, 지금 지배자의 위치에 놓인 그들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총과 폭탄을 세례할 수 있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은 여지껏 이스라엘이 행한 인종 청소 작업 가운데서도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히틀러의 그것을 능가하기까지 한다. 나치는 유태인을 말살하기 위해 그들을 먼저 ‘인간 이하의 대상’으로 추락시키는 작업을 필요로 했던 반면, 유태인들의 아랍 인종 청소에는 그런 귀찮은 작업이 필요없다. 무슬림은 애초부터 그들의 눈에 ‘인간 이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나치의 인종청소는 (지젝이 알려주듯)코미디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나치 스스로도 코미디화할 의도가 조금도 없었던, 진지하고 악마적인 미학적 작업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아랍 인종청소를 웃음의 대상으로 희화화하며 거기에 열렬히 ‘환호’하기까지 한다.

가령 이스라엘의 한 TV 코미디 프로그램은 가자지구 학살을 스포츠 중계 형식으로 표현해 물의를 빚었다. 이 쇼에서 종군 기자로 분한 한 연기자는 “(사망자 수가) 현재 원정팀 500명, 홈팀 4명입니다. 아직 괜찮습니다만 여기서 만족할 순 없습니다. 격차를 더 벌려야 합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의류상점 1곳을 제대로 강타했습니다. 원정팀 501명이 됐습니다” 하는 식으로 눙을 쳤다는 것이다. 또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학살 장면을 ‘관전’하기 위해 유태인들이 가자 접경 지대에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쌍안경을 가지고 와서는 폭격이 터지고 ‘무슬림’이 죽을 때마다 단체로 ‘브라보’를 외친다. 유태인들이 ‘정치적으로 불공정한’ 홀로코스트 코미디나 재해석에 어떤 식의 반응을 보여왔는지 생각해 보라. 적어도 히틀러와 그 졸개들은 홀로코스트를 ‘재미’를 위한 ‘코미디’의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한다.

다시 [독재자] 이야기로 돌아가자. 마지막을 장식하는 연설 장면에서, 우리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유태인 이발사가 점차적으로 감독인 채플린 자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채플린 최초의 유성 영화인 이 영화에서 연설 장면은 채플린 본인의 육성을 ‘본격적으로’ 들어볼 수 있는 최초의 장면이기도 하다(그 이전 장면까지 채플린은 기존의 무성 영화 어법을 사용해서 코미디를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던 이발사는, 연설이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갑작스레 강렬한 카리스마와 열정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부들부들 떨며 연설하는 이발사의 시선은 곧장 관객 -2차 대전 직전의 서구인들- 을 향하는데, 이는 감독이 보는 이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연설하는 주체는 실은 이발사가 아닌 채플린 본인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독재자 히틀러의 입을 빌려 채플린이 연설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독재자로 오인된 유태인의 연설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히틀러로 위장한 채플린 그 자신의 연설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작가의 의도’는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 ‘작품의 의도’까지 채워주지는 못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 영화는 2차 대전이 있기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에 이 영화를 처음 본 대부분의 관객은, 마치 이 영화가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모든 비극이 완료된 뒤에 만들어진 희극(“희극은 비극 더하기 시간이다”)이라고 여기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채플린이 영화를 2차 대전 이전에 완성했음을 알게 되는 순간, 영화는 일종의 ‘예언서’와도 같은 지위로 올라서게 된다. 채플린은 ‘그 모든 것’이 있기도 전에 미리 모든 것을 내다보고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독재자]를 소급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채플린이 알지 못했던 다른 부분 -2차 대전 이후의 이야기-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과잉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즉 [독재자]는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말해줄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 벌어진 이스라엘의 아랍 인종 청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말이다. 이게 바로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펼쳐지는 ‘작품의 의도’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유태인과 히틀러의 위치를 뒤바꿈으로써, 히틀러가 유태인의 ‘타자’가 아니라 실제로는 유태인 자신들의 외밀한 중핵(extimate kernel)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겉으로는 순박한 외관을 하고 있지만 무슬림에 대한 유태인 특유의 편견을 간직한 이발사와 -이런 관점에서 연설에서 그가 이야기한 ‘인류애’는 무슬림을 제외한 ‘인간’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된다- 유태인에 대한 깊은 증오와 경멸을 품고 있는 독재자가 자리바꿈을 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들 속에 진작부터 존재해온 타자-되기를 완수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독재자]를 바라볼 때 채플린의 이 위대한 걸작은 단순히 감상적인 홀로코스트 코미디가 아닌, 반 세기 뒤의 현실을 미리 앞서 조명한 생명력 넘치는 영화로 재탄생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히틀러(로 오인된 이발사)의 입을 빌어 인류애를 역설하는 채플린의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애를 외치는 유태인 이발사가 그 이후에 무슨 일을 했는가 — 유태인이 된 히틀러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가’를 (포스트모던의 방식대로)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그 두 존재가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의 두 가지 표현이라는 점을 인식할 때, 오늘날의 아랍 인종청소를 이해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이 글은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와 [까다로운 주체], 요하임 C.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을 상당부분 참조했습니다.


2009/06/28에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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