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디자이너의 2주년 기념 회고

HEO
5 min readSep 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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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트업에서 AI기반의 의료 진단 SaaS를 만들고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2020년 11월에 작성한 글을 이 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는

나는 회사가 설립된 후 처음으로 합류한 디자이너이다. 여느 스타트업 디자이너가 그러하듯, 초반에는 일의 종류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어느 날에는 프로덕트 기획을 하다가 또 어떤 날에는 리쿠르팅 행사에 가져갈 굿즈를 만들었다. 대표님의 제안으로 CI를 리뉴얼하기도 했다. (입사 전까지 브랜딩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 초기 스타트업을 모르는 게 아니였어서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만능(잡)캐가 되어가고 있었다.

작고 귀여웠던 그 시절 우리 팀

구글에 ‘스타트업 디자이너’로 검색해보면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비슷하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해야하고, 때때로 본업을 잊게 되는.. 좋게 말하면 제너럴리스트, 안 좋게 얘기하면 잡캐 디자이너.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듯이 나는 초기 스타트업에서 전반적인 업무를 경험해보는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싶다. 아니, 좋은 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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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 오히려 좋아

작년 봄에 북미 최대 규모의 병리학회인 USCAP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전시 부스와 브로슈어 디자인, 그리고 부스 방문객을 응대하고 방문자 정보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처음으로 사무실 밖에서 서비스의 사용자를 대면했던 날이다.

“인공지능이 의사를 대신한다면 우리는 일자리를 잃게 되나요?” 라고 물었던 백발의 의사선생님. 인구 수 대비 의료인이 부족해 양질의 의료 진단이 어려움을 토로했던 브라질 병리과 의사 선생님 등 사용자를 만나서 의견을 들었던 경험은 회사 생활 중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이다.

내가 만든 부스에서 방문객 받기

경계 없이 전방위적으로 일을 하면서 병리학과 의료AI에 대해 공부하며 나만의 인사이트를 축적할 수 있었다. 만약 프로덕트에 관련된 일만 했다면 문과 출신의 디자이너인 내가 이 분야의 지식을 이 정도로 학습할 수 있었을까? 여기 저기 불러다니며 이 일 저 일 하는 동안, 나는 제품을 넘어서 마켓과 비즈니스 관점에서 프로덕트를 보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치는 내가 ‘잡캐’가 아니였다면 아마 얻지 못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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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성장하기

혼자 일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작업물 피드백은 물론 가벼운 디자인 이야기조차 나눌 사람이 없다는 점이 나를 지치게 했다. 개발자와 엔지니어에 둘러싸인 환경은 종종 외국인이 된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게 맞을까?’하는 불안감에 직업만족도가 곤두박질치는 날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 한줄기 빛이 되었던 건 온라인 상의 다른 디자이너들이다. 옆자리의 훌륭한 사수를 보고 배울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축복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디자이너가 서식하는 장소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공개된 채널에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와 거기서 얻은 지식을 기꺼이 공유하는 선배 디자이너들 덕분에 나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브런치와 미디엄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디자이너들의 글은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공감이 됐다. 지금은 코로나로 많이 축소됐지만 디자인 컨퍼런스나 밋업 등 사무실 밖에서 디자이너와 교류하는 시간은 일상에 환기가 될 뿐만 아니라 큰 자극을 주었다.

이제 나는 더이상 외롭게 일하지 않게 됐고 혼자라도 괜찮을 수 있는 나름의 요령을 터득한 것 같다. 나만의 방법을 찾기까지 커뮤니티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거다. 나의 랜선 사수, 동료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나 또한 좋은 디자이너로 성장해서 어딘가에서 외롭게 일하고 있을 디자이너들을 위해 배운 것들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싶다.

2019년 7월, 스펙트럼 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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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넘긴 2년, 앞으로는?

지난 2년, 딥바이오 브랜딩과 DXC의 베타 버전을 준비하며 각종 일들이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갔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느 것 하나에 질릴 새 없이 다양한 디자인을 하며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엔돌핀이 도는 것처럼 즐거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즐겁지 않았다면 못 버텼을거다. 언제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 동료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처음으로 나에게 디자인 결정권이 주어진 곳에서 ‘잘 해야지’하는 마음이 지칠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는 나의 마음에 집중하며 앞으로 다가올 파도를 즐겨보려고 한다.

회사와 비즈니스의 규모가 커졌고 팀에도 많은 변화가 생길 예정이다. 그 중 하나는 디자이너 채용과 프로덕트 팀 빌딩을 준비중이라는 것! 오만 디자인을 해치우던 지난 날은 청산하고, 프로덕트 관점에서 깊게 고민하는 환경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런 저런 변화를 앞두고 걱정도 되지만 지난 2년을 생각해 보면 못할게 없지 싶다. 2021년, 2022년에는 나는 어떤 회고를 하게 될까? 앞으로의 시간들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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