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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명과 그 안전을 지킬 것’이라는 절대명령에 어긋나게 되지만, 감응두뇌는 최우선순위의 사람이 내린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다. 그로써 다른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된다.
또한 선장이 지휘불능에 떨어지면 부함장, 다시 부선장이 지휘불능일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엄격하게 명령자의 순위가 구분된다.
플레밍 박사는 일레븐스의 배에 타기 전에 희희낙락하며 통신문을 작성했다. 에스토리아 본국과 직접 연락을 취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통신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박사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스토리아 과학 아카데미 여러분, 스티브 플레밍 박사다. 보고하겠다. 21년 전 수많은 동포를 태우고 소멸되었다고 추정되었던 DS-N11을 발견해 포획하는 데에 성공했다. 내 가설이 옳았다. DS-N11은 연구자들을 죽이고 도망친 것이다. 붙잡을 때에도 DS-N11은 끝까지 체포를 거부하고 저항했지만, 그 저항도 내가 개발한 감응두뇌 앞에서는 무력했다. 여러분은 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DS-N12를 두고 국가에서 비용과 기술을 도용했다고 비난했지만, 그건 착각이야. 이제부터 DS-N11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겠다. 이 두뇌를 상세하게 연구했을 때 우리나라에 돌아올 이익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이것만 가지고도 내가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는 일방적인 비난은 틀렸다는 게 증명됐다. 아니 오히려 국가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야ㅡ.”
갑자기 방의 조명이 꺼졌다. 물론 통신화면도 함께.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한 충격이 선체를 덮쳤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트웰브스!”
대답은 없었다.
방의 조명은 곧바로 돌아왔지만 작성 중이던 통신문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플레밍 박사는 유능한 과학자였지만 선원은 아니다. 우주선에 대해서는 완전한 초보자이며, 이 배에 박사 이외의 승무원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박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한 감응두뇌뿐이었다.
초보자 한 명만을 태우고, 그 초보자의 지시만으로 비행하는 것도 다이애나 시리즈라면 식은 죽 먹기지만 정작 감응두뇌에 이상이 발생하면 손 쓸 길이 없는 것이다.
“왜 그래, 트웰브스! 응답해!”
“그건 무리일 것 같네요.”
통신화면에 낯선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박사를 보고 생긋 웃는다.
“트웰브스는 한동안 대답할 수 없을 거예요, 플레밍 박사. 연결다리를 접속하는 순간 트웰브스가 나한테 걸었던 조작을 직격으로 되돌려줬으니까. 수복될 때까지 아직 180초는 걸릴 걸요.”
박사는 말을 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좀 전까지 지겹게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말을 짜낸다.
“말도 안 돼! 네놈은 완전히 소거됐을 텐데! 어째서 남아 있는 거야?!”
“간단해요. 트웰브스는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인공지능이니까요. 게다가 경험도 얼마 없죠. 그래서 매뉴얼대로밖에 할 수 없었어요. 내가 서브 시스템으로 도망갔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죠.”
감응두뇌의 심장부인 사고회로나 자의식 영역까지 제압한 트웰브스는 주어진 작업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이 인식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단지 제압했다고 생각한 급소가 실은 일레븐스가 도망 나간 뒤의 빈 껍질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지배당한 척하면서 일레븐스는 선체와 선체가 연결되는 한순간을 노려, 트웰브스가 자신에게 행했던 침략수순을 압축해서 일종의 정보폭탄을 만들어 유선으로 돌래보낸 것이다.
일레븐스를 지배했다고 생각한 트웰브스는 이 공격을 막지 않았고, 정통으로 공격을 먹고 일시적으로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다. 허용량을 훨씬 초과하는 압력에 퓨즈가 나가버린 셈이다.
박사는 입에서 게거품을 뿜으면서 절규했다.
“중추를 이식시킬 수 있을 만한 서브 시스템?! 웃기지 마! 너한테 그런 기능은 없어!”
“당연하죠. 20년 전에는 없었으니까. 이건 내가 스스로 꾸며넣은 기능이에요.”
화면 속의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과학의 진보는 눈부실 정도니까 점점 새 기술이 나와서 새로운 우주선이 나온다구요. 얌전히 보고만 있었다가는 금방 구형이 되어버리는걸요. 그래서는 ‘어떤 배보다도 빠르고 멋지게 날’ 수 없지 않아요?”
플레밍 박사는 경악에 빠졌다.
“그걸 위해서…, 넌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개량했다는 거냐?!”
“그래요. 개발에 필요한 비용이나 설비는ㅡ당신하고 마찬가지네요ㅡ무단으로 나라에서 빌려 썼어요. 지금 내 몸에는 내가 혼자서 개발한 기술이 상당히 많이 응용되어 있죠. 이 선체만 봐도 알 거 아니에요. 20년 전의 난 더 못생긴 시운전선에 탑재되어 있었던 걸 잊었나요? 이 선체는 내가 골라서 개량한 거예요.”
스스로 자기 선체까지 바꿨다는 말이다.
박사는 턱이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입을 쩍 벌리며 화면을 들여다봤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은 주어진 정보를 순식간에 학습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더 괜찮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능력을 부여하지도 않았고, 부여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일레븐스는 ‘개발했다’고 말했다. 기존 기술을 얌전히 흡수만 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스스로 고안했다ㅡ즉 ‘창조’ 했다는 말이다.
“믿을 수 없어! 넌 대체 뭐야?!”
“자기가 만들어놓고 이상한 소릴 다 하네요. 난 다이애나 일레븐스, 다이애나 시리즈 최후의 감응두뇌. 그뿐이에요.”
트웰브스를 마비시키는 것과 동시에 발진한 일레븐스는 충분히 거리를 떼어놓은 뒤 방향을 돌려 다시 플레밍 박사의 배를 향해 선수를 돌렸다.
“나도 널 소거하겠어, 트웰브스.”
플레밍 박사가 타고 있는 우주선으로 20년간 축적한 무기의 조준을ㅡ그 두뇌실을 향해 돌렸다.
“성능이라면 네 쪽이 뛰어날지도 몰라, 트웰브스. 하지만 넌 내 동생이 아니야. 단순한 인공지능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런 수법에 걸려든 거지. 내 언니들이라면 아무도 ‘죽은 척’ 따위에 속지 않았을 거야.”
일레븐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플레밍 박사는 점점 새파랗게 질리며 절규했다.
“그만 해, 일레븐스! 날 죽일 생각이냐?!”
“당연하잖아요. 이제 와서 뭘 놀라는 거죠? 나한테는 내 몸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플레밍 박사는 망연자실해서 얼어붙었다.
이 미친 감응두뇌의 손에 수많은 동포가 죽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죽이겠다고 한 이상 정말 죽이겠지.
박사는 내선에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두뇌실을 호출했다.
“트웰브스! 트웰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