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 영국정원 -short

만약 당신이 가을이나 겨울에 뮌헨에 있는다면,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뮌헨에 있는 대부분의 날은 흐릴거다. 그 날씨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피나코테크 미술관의 어딘가에서 예술작품을 보고 있다가, 슈바빙 지구의 카페에 앉아서 여행 일정을 정리하고 있다가, 쇼핑몰에서 자라가 한국보다 얼마나 싼지 가격 비교를 해보고 있다가 문득 위를 올려다 보았을때 하늘이 파래지는 기색이 보인다면, 그때는 하던 것을 멈추고 바로 영국정원으로 가야 한다. 입구에 가까이 왔을 때 쯤엔, 줄지어서 공원으로 걸어들어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엇 나도 좀 현지인 같은 생각을 했는데? 하고 조금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

뮌헨의 북동쪽에 위치한 영국정원을, 성북동쯤에 위치한 부잣집 어딘가에서 꾸며놓은, 잔디와 주목과 금붕어를 키우는 돌로 경계를 나눠놓은 연못이 있는 정원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베르사유 궁전 뒷쪽의 정원을 생각하고 와도 깜짝 놀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정원보다는 공원이 어울리는 규모다. 런던의 하이드파크,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에는 서울숲이 있지만…십년 쯤 후에 나무가 다 자라면 다시 한번 비교해 보겠다.

걸어다니며 본 영국정원의 풍경은 꽤나 다양했다. 울긋불긋 가을옷을 입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모여있는 듯 싶다가, 어느 순간에는 넓은 잔디밭이 나왔다. 사람들은 앉아서 점심을 까먹고, 산책을 하고, 조깅을 하고, 캐치볼을 하고, 개들과 놀고, 그리고 다 벗고 일광욕을 즐긴다. 정말이다. 자전거를 저만치 세워놓고, 잔디밭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무 밑에 전라로 앉아서 햇볕을 쐬고 있다. 할아버지다. 피부는 검붉고, 머리는 하얗다. 전라다. 깜짝놀란 우리는 못본 척 발걸음을 재촉하여 스쳐지나갔다. 알고봤더니 영국정원에는 누디스트존이라고, 벌거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구역이 따로 있었다. 젊은 남자 두어 명이 하늘을 보고 전라로 누워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구역을 벗어나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햇볕이 쨍한 날이 별로 없는 겨울이라, 해가 떴을 때 온 몸으로 그 볕을 다 받아내려고 하는 것일까?

그 햇볕 부자들, 비타민 부자들을 비롯해서 공원에서 늘어져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다보니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릴없이 공원을 거닐다 잔디밭에 누워서 낮잠을 잘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을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여행자임에도 말이다. 오늘 들려야 하는 곳들이 있고, 오늘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고, 방문해야 하는 도시들이 있고, 체크인 해야 하는 호텔들이 있다. 이곳을 오기 위해 치룬 기회비용들이 최소한 ‘본전'은 뽑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여행의 모습은 그런게 아닌데, 일정을 짜다 보면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된다.

오늘은 좀 반성하기로 하고, 여유를 부려보기로 했다. 누디스트 할아버지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까지 걸어서 젖은 잔디 위에 지도를 깔고 앉았다. 오늘의 점심은 아침에 뮌헨 중앙역에서 산 안티파스타 샌드위치와 스틱 야채. 가지와 파프리카등의 야채를 구워서 빵 사이에 낀 안티파스타 샌드위치는 이번 여행에서 먹었던 샌드위치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산지 좀 되어 야채의 수분이 빵을 조금 눅눅하게 한 것이 조금 아쉬웠을 뿐 일반적인 햄, 치즈 샌드위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오이, 당근, 샐러리로 이루어진 야채스틱은 반대로 샀을 때보다 약간 말라 있었지만 마요네즈에 찍어 먹으니 꿀맛이었다. 자리를 잡자 마자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들이 주변을 맴돌면서 우리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던저주지 않자 하나 둘 씩 다시 날아가버렸다. 남은 빵 조각을 몇 개 던져주었더니 순식간에 열 마리도 넘는 까마귀들이 모여들었다. 한국의 까마귀보다 덩치가 더 컸는데 사람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거꾸로 우리가 조금 무서워져서 일어나 걸었더니 푸드득 거리며 한참동안이나 따라왔다. 우리의 여유를 까마귀들이 끝낸 셈이다.

배가 찬 우리는 다시 힘이 나서 길을 따라 공원의 북쪽으로 향했다. 영국식 조경을 해서 이름이 영국정원이다. 그런데 공원 안에 좀 뜬금없게 일본 찻집도 있고 중국탑도 있다. 덕분에 4개국이 모인 공원이 되었다. 동아시아 3개국 중 한 나라가 빠져있는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싶다. 남쪽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 찻집이 있는데, 따듯한 차로 몸을 녹이고 싶었으나 문이 닫혀있었다. 정원의 중앙쯤에는 중국탑도 있고, 그 근처에 비어가르텐도 있다고 지도에 나와있었다. 아무리 해가 떴다고 해도 이 추위에 누가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나 싶었는데,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많았다. 중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듯 보이는 탑 위에는 독일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악기를 들고 민요를 연주하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맥주와 소시지, 커피와 빵등을 먹고 있었는데 추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한국인 두 명이 독일에 여행을 와서 영국정원에 들렀는데 일본찻집은 문을 닫았고 중국탑 위에서는 독일사람들이 독일 민요를 연주하고 있다. 그야말로 지구촌 시대다. 우리는 추위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라서 따듯한 커피를 한 잔씩 마셨지만 커피의 온기가 다 식자 못견디고 일어나 북쪽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중국탑 북쪽에는 호수인지 연못인지, 하여간 꽤 큰 물가가 있었다. 청둥오리, 회색오리들은 물론 백조와 갈매기들이 둥둥 떠다녔다. 뮌헨은 독일의 남쪽에 있는 도시니 북해까지는 한참 멀고 지중해도 프랑스 등을 건너야 나오는데 어디서 온 갈매기일까. 부모들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새들에게 과자를 주며 신나하고 있었다. 우리도 서로 손을 잡고 (확실치는 않지만, 대구를 위해서 잡았다고 치자) 빵 부스러기를 주며 신나했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습득하게 된 팁을 하나 말해주자면, 식당에서 남은 빵은 꼭 휴지에 싸서 가방속에 넣어 와야 한다. 유럽 어디에서든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빵부스러기와 애교를 맞바꿀 준비가 되어있는 새들이 잔뜩 있기 때문이다. 건너 저쪽 물가에는 또 비어가르텐이 있었는데, 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시끌벅적하니 사람들이 꼬물거리고 있는 것이 그들도 신나 보였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마지막 하나 남은 부스러기들까지 새들에게 주다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푸르스름해지고 햇볕은 닿는 것들을 금색으로 물들인다. 물결도 금색으로 반짝인다. 이제 겨우 네시 반인데, 다섯시만 되어도 깜깜해질 느낌이었다. 날은 춥고 기분탓인지 배도 좀 고픈 것 같다. 샌드위치를 먹은 지 네시간도 안된 것 같은데 말이다. 아쉽지만 물새들과 작별을 고하고 정원의 북서쪽으로 나와서 슈바빙 지구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우구스티너 켈러에서 저녁을 먹고, 야간열차를 타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날이다. 이때까지는 아주 기분이 좋은 날이었지만, 우리는 몰랐다. 이 날은 아주 긴 하루였고,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