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理科) 출신 미대생들


내게 마치 인생의 갈림길에 놓여지는 듯 여겨진 첫 번째 공포가 바로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주한 학과의 선택이었다. 문과(文科)-Liberal arts와 이과(理科)-Natural sciences 어느쪽이든 당장 선택한 이 길이 내 앞길이 될 거라는 부담감.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분명히 어려운 일이었다.

학창시절 직접 겪어본 인문계열과 자연계열 차이의 체감 정도는 미미했지만 대학 진학 후 사회생활까지 이어진 문과 출신과 이과 출신의 구분은 갈수록 명확했다. 문과 출신이 공대에 들어갈 확률이 이과 출신 미대생을 만나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 청소년 때 스스로 결정했던 방향이 인생의 진로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여진다.

당연히 문과를 선택해 그림쟁이, 글쟁이로만 살아온 내게 디자인Design은 이과 출신 미대생을 보는 것과 같이 낯선 분야였다. 이미지를 다룬다는 점 때문에 미대 학우로 인식은 했으나 디자인학과 학생들은 나와 어울려다니던 내 친구들처럼 물감과 먹으로 얼룩진 옷을 입는 법은 없는 일종의 변종들 같았다. 불편했다. 똑 같이 실기시험을 치루고 들어온 마당에 그림쟁이 코스프레라며 이유없이 미워할 수도 없고 상대적으로 깔끔해 인기가 많은 학과라서 어쩐지 살짝 부럽기도 했으니까. 고등학교 때 늘 우리 문과보다 성적이 좋았던 이과생들을 보는 기분 같았다.

90년대 초, 디자인에 대한 한국의 일반적인 인식은 충무로와 을지로에 밀집된 인쇄소들을 먹여살리는 비싼(!) 일거리였다. 늘 무언가 대단한 산업으로 발전할 것처럼 보여지고 소개되기는 했으나 멋져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마땅히 그 역할을 설득하기에는 부족한 분야였다. 특히 당시의 디자인은 출판산업에 주로 집중돼 있었고 모든 출판/인쇄 업체들이 값비싼 애플-매킨토시 단 한 종의 장비로만 소통했기 때문에 웬만큼 부자가 아니면 접근하기조차 어려웠어서 가난한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는 이따금 열등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디자인 분야는 불안정했고, 달랐다.

하지만 나의 시기와 질투에 반해 디자인 분야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진화했다. 디자인은 이제 이미지(그림)를 벗어나 그 자체로 산업이 되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루는 분야가 됐고, 예쁘게 꾸미거나 치장하는 작업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을 편리하게, 메시지를 정확하게, 관계를 빠르게 하는 포괄적인 목적성까지 아울러 포용한 도구가 됐다. 붓이나 팔레트 대신 자Ruler와 각도기Protractor가 내장된 툴을 사용하던 ‘이과 출신 미대생’들이 자신의 분야를 예술의 범주 밖으로 꺼집어낸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혁신과 맞물려 세상은 디자인에 의해 변했다.

굳이 비교는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변화를 목도하거나 직접 경험하는 입장에서 나는 이제 더이상 디자인을 미술과 구분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이과 성향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들이 공학인지 물리학인지 인문학인지, 아니면 비즈니스인지 여전히 예술인지 잘 모를 정도로 다양한 학문이라는 데에 이견조차 못 내놓겠다. 그저 디자인이 이끌어내고 바꾸어가는 지금의 세상이 혁신이고 진보라고 받아들이고 있을 뿐.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지만 디자인은 지금의 ‘우리’다. 그리고 나는 이 낯섦에 순응하고 있다.

실제로 디자인 전공자 대부분은 문과 출신들인 것으로 안다. 그들의 창의력과 감성이 이과 특유의 공학적 성향과 만나 기능성을 발견하고 인문계열 전체를 압도하며 세상을 이끌어가는 형국이다. 이과 출신은 미대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도 없거늘, 나는 왜 그토록 문과와 이과를 따져가며 디자이너들을 질투했을까? 거창하게 예술을 하고 살겠다는 꿈이 인간의 삶 전체를 바꾸고 있는 그들의 진보적인 능력에 비해 하찮게 느껴진 지금,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와 같은 그림쟁이들이 추구하려는 목적은 아무리 잘 형용한다 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삶, 미래, 세계 혹은 자아 등을 표현해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조용히’ 공유하고 사는 우리 인간을 분석하는 일, 발가벗겨 드러내는 일, 그래서 끝없이 인간을 대표하는 자신을 파헤치고 또 긁어대는 미친놈들. 그게 바로 예술이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아티스트들이다. 그래서 표가 안 난다. 미술이 어떤 변화도 혼자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나는 한동안 열등감에 사로잡혔나 보다.

이따금 그림 못 그려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친구의 주장에 소심하게 “아니야. 그럴 수 없어”라고 말했다가도 정말 곧 그림 못 그려도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고 편리함까지 발명해내는 결과를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냉큼 입을 닫는다. 나는 요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온 문과생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과 성향의 학생들이 미대의 정의를 뒤흔들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시대에 약자가 된 기분이다. 그렇지만 나쁘지는 않다. 디자인을 통해 보는 세상사 시대상이 극장 안 스크린 속 영화처럼 재미있으니까.

예술(이 부분에서는 Fine Art라고 부르자)은 여전히, 변함없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록Rock이다. 이 사실은 디자이너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은 앞으로도 한자리에 조용히 존재할 것이고, 디자인은 계속해서 춤을 출 것이다. 그들이 연출하고 만들어가는 새로운 변화와 발명품들 또 한편에서 나는 열심히 기록하며 공존할 생각이다.

미안하고 고맙다. 내 좁은 관념을 깨 준 디자이너.

존경하고 응원한다. 진보하는 디자인.

이 이과 출신 미대생 같은 디자이너들!

English Version Click Here 

K/REATE is the professional association for art founded by members of the Korean who are working in Creative fields. We are based on Seoul, London and New York. Our members are Artists, Designers, Dancers, Musicians and so on. Regardless of these awesome back grounds, we will think and suggest creative solutions for social issues and help our students in the name of K/RE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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