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남성이 누리고 있는 기성의 권력을 느낀다. 또한 나는 그와 반대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겪어야 했던 불평등과 차별, 모욕과 공포를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보거나 듣고, 또한 이해해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리고 있는 수많은 기득권에 대해서도 함께 반성하고자 노력했다. 나의 주변에서 당연한듯 이루어지는 Misogyny — 여성혐오로 번역되나, 개인적으로는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말하는 바에 따라 여성 멸시로 지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에 대해서도 그것을 바로잡고자, 혹은 그것에 저항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해왔고, 그렇게 말할 때마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지탄을 받아왔다. 내가 바로 페미니스트이니, 페미니스트를 타자화하지 말라는 말들을 수없이 들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규정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 혐오라는 번역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맥락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던 기억이 있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던 적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페미니즘을 잘 알지 못하고, 여전히 생활인의 감각에서의 더 나은 삶을 추구할 뿐, 그것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지칭함에 있어 부채감과 무력함을 느끼곤 한다. 나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평등한 삶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 적이 없으며, 그 사상적인 맥락의 끝자락 조차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아직 보부아르의 사상을 알지 못하고, 길리건의 이론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싸워왔던 그 길 위에 숟가락 하나 올려놓듯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기에는 아직 부끄러움이 많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재단하기에 앞서서, 함께 싸우자고 권유하는 것만큼의, 때로는 누군가가 그만큼의 부채감과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말이 여성 혐오를 저지르겠다는 선언과 동치 명제로 성립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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