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그렇게 예민해?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나는 꽤 예민하고 민감한 편이었다. 가령, 수업 중 정상인이라는 말을 하는 선생님에게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닌 비장애인이라는 지적을 당연한 듯이 했고, 근무 교대도 없이 하루종일 근무하는 학교 경비원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자 대의원 회의에 안건을 상정하기도 했다.

사실 그 예민함의 대상이 나에 대한 지적과 부당함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는 어르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 처음보는 학생과 함께 우산을 써야만 마음이 편할 뿐이었다. 어쩌면 나의 예민함은 오직 다른 이의 부당함을 향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살아가면서 ‘굳이 예민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음을 반증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나는 남성이다. 미래의 직장에서 유리천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늦은 밤 골목을 걸으며 뒤를 좇는 발소리에 겁을 먹지 않아도 된다. 장애가 없이 태어나, 지금까지도 큰 장애없이 살아왔다. 키가 작지만 일상에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고, 루키즘의 광풍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나는 헤테로섹슈얼이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았고, 시스젠더라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춘기의 격동 속에서도 욕구와 해소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없이 평탄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은 없지만, 운이 좋아 얻은 성적들에 공부를 잘한다는 어울리지 않는 말도 들어왔다. 교사들은 튀어 오르지 않는 나에게 굳이 체벌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는 않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에 재수를 결정할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대학에 가더라도 학비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수험생활을 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아도 사회의 큰 틀과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담배를 필 때도, 나이를 먹은 체하며 편의점 점원만 속이면 되는 일이었고, 두발규제 앞에서도 지금만 잠시 참으라는 꾀임 앞에 타협하면 ‘융통성’ 있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나의 정체성이나 존재 자체에 모욕과 멸시를 받을 일이 없이 살아왔다. 그렇기에 나는 나에 대한 예민함이 솟아날 일이 없었고, 그것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두발규제에 저항하면서도 최선을 다할 이유는 없었고,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의 자율 참여 또한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정독실에 몸 담고 있으면서 그 차별 의식이 두렵기는 했지만, 아찔한 우월 의식에 젖어 있기도 했다. 내가 싸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평탄한 삶 속에서 나의 예민함은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기에 점점 더 무뎌져 갔다. 나는 더 이상 혐오 언설에 분노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이가 겪는 부당함에 맞서 함께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나에게도 가끔은 예민하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병신’ 이라는 말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나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전체주의라면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비꼬았고, 졸업하면 남의 일이라며 두발자유를 건의하던 나를 쏘아 붙였다.

이토록 많은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나에게도 나의 예민함을 나의 잘못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새벽의 닭이 울기 전까지 예수를 부정했던 베드로와 같이 하루에도 수십번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멸시 받는 사람들이 느껴야 할 모멸감의 깊이를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또한 그들에게 죄명처럼 붙여질 ‘예민함’ 이 줄 또 다른 상처 또한 가늠할 수 없다.

예민함은 죄도 잘못도, 눈치 없음도, 괜한 불평도, 사소한 것에 대한 투정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들에 대한 싸움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 예민한 이들을 벼랑 끝으로 쏘아 붙이지 마라. 그들은 하루에 수십번도 넘게 벼랑 끝에 서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사소한 예민함이 누군가에게는 사소하지 않을 수 있고, 그러한 예민함이 우리의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때가 있다. 그 역사의 주인 혹은 증인으로 살지는 못하더라도, 반역자로 살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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