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개인이 이루는 공동체의 견고함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도덕적 직관은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본능이다. 이 본능은 우리에게 명령한다. …중략… 만약 누군가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피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비범한 부류’ 또는 초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리고 그 반대편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의사 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유시민, 「청춘의 독서」 0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정치란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 유시민, 「청춘의 독서」 08.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 : 사마천,「사기」
내 정강이에 난 털 한 올을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이 한 올을 뽑지 않겠다.
- 양주
법의 목적은 평화, 그 목적에 이르는 길은 투쟁.
-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세 명의 사람이 세 권의 책에서 네 가지의 이야기를 한다. 언뜻 보면 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저 말이 모두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공동체는 누군가가 대신해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 세상을 이루는 실존적 개인들이 쌓아올린 합의의 총체이다. 물론 이 명제는 사실 명제보다는 당위 명제에 가깝다. 이 말을 붙여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실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온전히 우리가 함께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설계했던 이가 있었고, 완장을 차고 현장을 지휘했던 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비참함과 무기력이 온전히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은 어쩌면 온전히 우리의 책임이 아니고, 나의 불행 또한 모두의 불행이라 부를 수 없다. 나약한 공동체에서 말미암은 이러한 고통과 슬픔은, 기실 이를 설계하고 감독하고 쌓아 올렸던 이들의 몫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서 타인에게 향하는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성공했는가. 집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없고, 당장 저녁의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이 없고, 하다 못해 억울한 죽음으로 유명을 달리 하는 사람은 없는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우리의 공동체는, 우리가 함께 쌓아 올려야 했던 그 실존적 층위는 비참하게 실패했고, 그 공동체는 우리를 단단하게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폐허가 된 우리의 삶을 보며 구원을 원하고, 절대자를 원하고, 그와 마찬가지의 누군가를 원한다. 그것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이고, 종교이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의존이고, 곧 실존적 삶의 절멸이다.
나는 우리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불행이 우리가 함께 공유해야 할 무형의 자산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누구에게도 스스로의 실존을 의탁하지 않고, 자신의 두 발을 지탱할 세상을 스스로 쌓아올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지금보다는 더 견고하게 우리를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 때가 된다면, 내가 디딘 이 땅의 반대편에서 들리는 곡성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슬픔은 더 이상 자랑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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