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수의 방정식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자취방을 빼고 통학을 한다고 했다. 이제 그가 집을 나서면 한 시간 남짓한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의가 없는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주말 저녁에 그는 춤을 추러도, 술을 마시러도, 하물며 침대에 누워 전화기를 들여다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 일련의 선택에는 느슨한, 혹은 긴밀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는 늘어난 그의 등교 시간과, 그것과 역의 상관관계를 가지며 줄어든 여가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다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오랫동안 만난 내 친구의 아버지는 근무하던 조선소가 망하고 가게를 차렸다. 그리고 내 친구는 휴학을 선택했다. 더 이상 학교와 가까울 필요가 없는 자취방을 비우고, 그는 보증금이 없는 자취방으로 떠났다. 이 또한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우리는 병에 남은 소주를 마저 따라 부었다.

큰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의 전액 장학금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의 친구는 학자금 대출을 받다가, 그 불어난 눈덩이를 감당하기위해 휴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란다.

단 한 명의 잘못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그 편이 적과 아군을 식별함에 있어서는 더욱 수월하겠지만, 우리의 전장에는 전선이 없다. 그러니 나는 그런 편리한 해석을 내어 놓을 수 없다.

다만, 그 책임에 경중이 있다면, 그 책임을 올려놓은 저울의 바늘은 얼마만큼이나 기울어져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기울어진 바늘만큼의 책임을 지고 있을까. 어쩌면 그 기울기의 역수가 우리에게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이 대개 그랬듯이 말이다.

기울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미분이 필요하다. 곡선 위의 한 점에서, 도함수를 구해야한다. 하지만 우리의 유예된 전선에서는 그 좌표를 구할 수 없다. 흐릿해진 기울기는 선명한 구호로 전환되어 우리의 삶을 예속한다. 나는 기울기는 커녕, 그 좌표 하나조차 구하지 못한다.

나는 이 역수의 방정식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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