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이라는 테제를 접하곤 한다. 그것은 수백의 삶이 물 속으로 가라 앉은 이후로, 그것을 기억하려는 이들에게서 더욱 자주 호명 되는 낱말이 되었다. 그들은 지켜주지 못한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로 자신의 슬픔과 절망, 무력함과 미안함을 적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이러한 낱말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낸다. 보호주의라는 프레임이 문제의 본질을 훼손하기에, 그에 따라 우리 아이들이라는 낱말은 불려질 수 없는 은유로 평가된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라는 낱말이 함의하는 본질은 보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생명을 물 속에 가라 앉게 만들고, 구할 수 있었음에도 구하지 못했고, 진실을 밝혀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한 기성의 구조를 창조한 일원으로서, 급변침한 체제를 수호해왔던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토해내는 미안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것의 본질은 보호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아올린 공동체가 그 누구의 생명도 온전히 지탱할 수 없다는 비극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서서히 가라 앉는 그 배를 지켜보며 느꼈던 무력함과 비탄, 자괴감과 미안함의 주인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고통에 책임을 느끼는 이들에게 안티테제는 가혹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은 우리의 이웃이고, 곧 시민이고, 국민이다. 그렇기에 가라 앉은 생명들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의무감 또한 그들을 향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먼저 태어나, 먼저 살아가는 기성 세대의 미안함을 구석으로 몰아세워야 한다는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한 개인의 감정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참여가 건전한 비판에 직면하여 더 나은 방향성을 가지고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슬픔과 무기력, 그리고 자책을 기성 세대의 보호주의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감정이라는 강력한 동기를 잃게 될 것이다.
Although emotions have limitations and dangers, and although their function in ethical reasoning must be carefully circumscribed, they also contain a powerful, if partial, vision of social justice and provide powerful motives for just conduct.
- Martha Nussbaum, 「poetic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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