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1편 : 어른이 되기까지

어떻게 나는 스타트업을 하게 되었나

사업을 시작하고 난 후부터,

다양한 분들로부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왔지만, 한줄로 풀어서 PR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어느날 순식간에 영감을 받아서 창업했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소소하게 부럽기까지 했으니까.

언젠가 이 복잡한 개인적인 히스토리를 정리해봐야지 라고 마음먹었던 터라 그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인생은 다음 점을 찍고 그것을 직선으로 그어가는 일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가면서 그 점과 가까워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아버지의 유전을 물려받아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나는 주의가 산만하다는 선생님들의 지적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실제로 20대까지 아버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약간 문어같다고 해야하나. (아직도 아버지나 나나 산만한건 어쩔 수 없는듯;)

태어나서 5살때까지는 충남 당진에 있는 공기업에 다니시는 아버지 회사의 사택에 살았는데, 그 곳은 김포공항에 착륙하는 항공기들의 항로였다. 하루는 하늘에 큰 새가 날아가는거 같아서 아버지께 무엇인지 여쭤보니, 비행기라는 것이었다.

5살 무렵
“커서 나도 조종사가 될래요!”

아직도 하늘을 자유롭게 날으는 비행기를 처음 본 순간만 생각하면 심장이 떨린다. 그렇게 파일럿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가, 발령나신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살게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부모님께서 당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에 꽂히셔서 “우리 진우도 음악 좋아하니까 바이올린을 시켜보자!” 해서 바이올린 학원과 집중 과외를 받으며 얼떨결에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었다.

6살: 뭔가 하기 싫은 표정

사실 과학상자나 컴퓨터 만지는게 더 재밌었던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전자제품들을 뜯어서 가지고 놀며 말썽 피우던 아이였는데,(냉장고는 왜 뜯어봤을까) 이때부터 약 6년간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다. 지금 시대에는 아이의 진로를 부모가 존중해주는 시대지만, 당시에 진로는 부모가 지정해주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공부에도 별로 소질이 없어서 학교에서도 사랑받는 학생도 아니었고, 뭔가 꼬인 기분이 들어서, 바이올린을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부모님께서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셨는지 내 바람을 들어주셨다.

그러고 중학교에 진학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그 좋은 방송국을 관두시고 사업을 시작하시는 바람에 어머니께서도 바쁘셨고, 누나도 입시 준비한다고 집에 잘 없게 되었다.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기 딱 좋은 기회
이때 친구들은 아직까지도 죽마고우들이 되었다.

학교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졸고 있는것 보다는,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뭔가 심장터지는 멋진 일을 하고 싶어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춤을 추러 다니게 되었고, 오토바이도 사고 싶어서 삐삐와 PCS(핸드폰 이전의 유물)를 판매하는 곳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학교와는 점점 멀어져갔다.

16살 : 수련회 반 대항전, 내 기억으론 이게 HOT의 늑대와 양이었던 것 같다.
윈드밀 기술은 당대 모든댄서들의 로망
17살 : 맥주집이나 커피샵을 매일 들락거리기도.

당시 나는 농구와 춤추는 것을 가장 좋아했는데, 농구선수도 되고 싶었지만, 농구선수하기에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고, 오히려 학교에서 하는 수련회 장기자랑이나 춤 대회를 나가면 어느 순간부터 1등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기 때문에 당시에 돌풍을 일으키던 BBOY 팀인 피플크루와 같은 댄서가 되길 꿈꾸게 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롤링페이퍼.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대형기획사에서 파워풀한 안무를 컨셉으로 하는 새로운 댄스팀을 결성하고 있다며, 나에게 명함을 주며 오디션을 보길 제안했다. 나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어머니께 그 명함을 보여드리며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그 자리에서 명함을 찢어버리시며, “우리집 전화번호도 가르쳐줬니?” 라고 물으셨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 즉시 전화를 해지하셨다. 그리고는,

“이제는 공부를 해야하지 않겠니?”

당시에 나는 너무 억울했다. 무대에 서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흥분되고 재밌는 일인지 이해하겠지만, 나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장이 뛰는 열정을 가르쳐준 것이 춤이었는데, 공부는 소질도 없는데 왠 공부..

어머니께서는 나를 앉혀 놓고 진지하게 그건 아니라고 다른 길을 찾으라고 권하셨고, 그 뒤로 방황에 가출도 종종하며 더 반항적으로 변해갔지만, 어머니께서는 끝까지 나를 포기하시지 않고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내 마음을 가장 크게 돌아오게 만든 것은, 매일 내 도시락에 꽂아주신 손수 작성하신 편지 때문이었는데, (무려 1년 동안) 그 편지에는 사서오경 의 한 구절로 시작하여 아버지께서 사업을 접으시게된 후의 우리 집안의 어려운 상황과 나의 미래를 걱정하시며 언젠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내용들이었다.

“어머니, 저 공부 해볼께요.”

오랜 방황끝에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학교공부보다 먼저 해야할 것이 있다면서 사서오경의 공부계획표를 보여주셨고,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또 많은 공감과 감동을 했었기에 순순히 어머니의 계획표대로 공부하게 되었다.

사서오경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군자로서의 자세, 삶에서 중요한 가치와 덕목. 무엇이 되어어라, 라기 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고 명예로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들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고3이었다.
당시 수능은 400점 만점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직업반에 갈 것을 여러번 권고했으나(중3때도 공고에 갈 것을 권유받았다.),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능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남들에 비해 초중고 12년의 시간이 뒤쳐졌기 때문에, 단순히 공부 시간만 확보해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나만의 공부하는 방법을 빨리 익혀야 했다. 문제집만 풀면 절반 이상이 틀렸기 때문에 오답노트도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한글도 제대로 못읽었다.)

그래서 어차피 학교에서 나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시간에는 중학교때 문제집을 구해 풀었고, 집에 와서는 고1때 문제집을 풀었다. 독서실을 안다닌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당시 시중에는 지금처럼 문제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수능 전까지 시중에 나와있는 모든 문제집을 다 푼다는 각오로 자면서도 풀던 문제집을 쥐고 잤고, 다 풀고나면 지우개로 지운 뒤 또 풀기를 반복했더니 수능때까지 평균적으로 모든 문제집을 5회 이상 풀어보게 되었다.


정말 무식했던 전략이었지만, 그러다보니 수능에 나오는 유형의 문제를 통째로 외우게 되었고, 모의고사 성적은 여름방학 시작할때쯤 300점을 넘기더니 그 후로 J커브를 그리게 되었다.

춤을 통해 배운 것이 배짱과 악이었던 관계로 시험당일 긴장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풀었고, 왠만한 약학대학 정도는 지원할 수 있는 성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문제아였던 사람이 공부하면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꼭 비아냥대고 놀리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이 분들의 주요 어록으로는, “진우 너 설마 공부하니? 왜?”, “너가 대학가면 선생님한테 연락 좀 주라, 너처럼 문제아도 대학에 간다는건 말이 안되잖니.” 등이 있지만, 이런 말들은 오히려 나에게 더 큰 자극제가 되었던 것 같다.

무례한 짓은 하지 말라. 무례함은 친절함보다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나에게 수능성적표를 주시던 담임 선생님의 커진 눈을 잊지 못한다. 이 경험은 어느 대회에서 1등 한 것 보다도 짜릿했다.

하지만 뭐 그렇게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었던 것이, 어릴때 파일럿의 꿈 때문에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고, 내가 가고 싶었던 대부분의 대학들이 내신 비율이 높아서 다 불합격이거나 예비였고, 운좋게 수능 90%에 면접 10%만 보는 전형에는 합격해서 대학생이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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