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시대 금융기관이 사는 법

핀테크 시대 금융기관의 역할: 네트워크 매개자 및 생태계 조성자

핀테크는 기존 금융기관과 새롭게 등장한 기술기반 기업의 충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변화를 시장 주체들 사이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사태를 단순화해주기는 하지만 많은 중요한 함의를 놓치게 만들기 십상이다. 기존 금융기관들이 하던 역할과 서비스를 기술기업들이 대체하는 것이 핀테크가 가져올 변화일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게 대부분의 산업 혁신 역사에서 배울 수 있었던 교훈이었다. 오래된 시장 주체와 새로운 주체사이의 자리 바꿈 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 환경, 기술 환경의 변화와 같은 좀 더 근본적인 요소들이다. 누가 누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맥락을 가진 네트워크와 생태계가 기존의 맥락들을 대체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최근 경험했던 모바일 혁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단순히 스마트기기제조사들이 통신사들을 대체한 양상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되면서 역관계가 바뀌었을 뿐이고, (앱 개발사, 컨텐츠 제공자와 같은) 더 많은 참여자들이 등장했을 뿐이다. 핀테크가 가져오게 될 변화 역시 이런 관점에서 전망하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핵심은 기존 금융기관과 새로운 주체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가로 모아진다. 단적으로 핀테크 시대에 전통적 금융기관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서울대 경영대 노상규 교수가 제시한 답은 아래와 같다 :

핀테크는 단순한 결제 기술의 혁신이 아니라, 사용자가 금융 거래 과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금융 전반에 걸친 ‘경험의 혁신’을 말한다. (중략)
금융기관은 더 이상 거래의 중심이 아니라 거래 당사자를 끊김없이(seamless) 연결해주는 매개자이자 조력자인 것이다. 결국 금융 전반의 컨텍스트의 혁신이란,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관점이 아니라 거래 ‘당사자들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던 90년대 말로 시계를 돌려보자. 기존 통신 공룡들은 기술과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다가 멸종해갔다. 반면 소프트뱅크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주체들과 함께하는 통신사의 모델을 정립하며 주체로 떠올랐다. 아울러 모바일 시대에 이르기까지 네트워크 매개자이자 생태계 조성자로서 위상을 강화하며 성장하고 있다. 애플 역시 전통적인 하드웨어 업체였지만 모바일 혁신을 주도하며 생태계 조성자로 스스로를 탈바꿈하며 세계 최대 시가총액 기업으로 부상했다. 누가 누구를 대체하느냐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거센 변화속에서 어떤 위상을 만들어가냐가 핵심이었다.

핀테크 시대, 금융기관의 새로운 위상 모델을 보여주는 사례들

1) 독일 피도르 뱅크

독일 뮌헨 소재의 Fidor Bank 는 매우 개방적인 태도로 새로운 금융기술들을 받아들여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은행은 지난 2013년 7월 전 세계 제도권 은행 중에서는 최초로 독일의 비트코인 거래소인 Bitcoin.de 과 파트너십을 체결, 고객들이 은행계좌와 비트코인 계좌를 연동해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 같은 서비스를 바탕으로 독일에서는 고객들이 보다 안전하고 편리하게 비트코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독일 정부 또한 비트코인과 가상화폐에 대한 과세정책 등을 가장 먼저 수립하게 되었다.

Fidor Bank의 개방과 혁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비트코인 거래소인 Kraken 과 파트너십을 체결하며 서비스를 확장했고, 이듬해인 2014년 1월에는 비트코인 파생상품 마켓을 열었다. 아울러 비트코인 기술을 이용해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결제수단인 Ripple 시스템에도 문호를 개방해 시스템을 통합했다. 이 통합 시스템을 완성한 지난 2월, Fidor Bank CEO 마티아스 크로네는 자신들의 개방 및 협업작업과 관련해 아래와 같이 입장을 밝혔다 :

리플을 이용해 전 세계 어디로든 돈을 빠르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가적인 비용 없이, (추가적인 개발 없이) 우리가 제공해 왔던 기존 서비스를 통해서 말이죠.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들의 개방성이 단지 수혜적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들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하는 발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새로운 가상화폐 기술과의 일련의 통합 작업 이후 Fidor Bank의 주가가 60% 이상 상승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은 전한다.

2) NYSE, Nasdaq 그리고 골드만삭스

미국의 금융기관들도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과감한 행보를 내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뉴욕증권거래소는 미국 최대 비트코인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에 투자를 단행했다. 이 투자라운드에는 스페인의 은행 BBVA 도 참여했고, 시티그룹의 대표를 지낸 Vikram Pandit 역시 개인자격으로 동참, 금융권의 높아진 관심을 드러냈다.

이 투자와 관련해 뉴욕증권거래소 Tom Farley 의장은 “의미심장하게 성장하고 있는 시장에서 투명성, 보안 그리고 신뢰를 갖춘 리딩 플랫폼인 코인베이스와 협력해 새로운 자산 시장에 접근해보려한다"고 투자 목적을 설명했다.

이에 질세라 나스닥 역시 비트코인 스타트업에 거래기술 공유하며 가상화폐 분야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Noble Market 이라는 비트코인 스타트업에 자신들의 트레이딩 기술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스닥의 이같은 행보는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어제(12일) 발표한 소식에 따르면, 나스닥은 비트코인이 핵심기술인 블럭체인을 이용해 pre-IPO 기업들의 주식거래를 자동화/효율화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소식을 전하며, 1>앞선 뉴욕거래소의 코인베이스에 대한 투자 2>미국 금융당국의 Bitcoin Investment Trust 펀드 승인 3>JP Morgan Chase 의 대표를 역임한 Blythe Masters가 비트코인 기술로 은행 트랜잭션의 속도를 개선하려는 스타트업인 Digital Asset Holdings 대표를 맡게 된 것 등 일련의 현상이 제도 금융권의 달라진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분석했다.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4월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비트코인 플랫폼 스타트업인 Circle의 5천만불 투자라운드를 리드했다고 발표했다. 이 투자는 단순히 재무적 투자가 아니라 전략적 협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투자은행으로서 선도성을 견지해 온 골드만삭스가 드디어 비트코인 투자에 나섰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개방할 것인가, 개방당할 것인가

Fidor Bank의 개방 전략이 단지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머물 것만 같지는 않다. 비트코인이 현실화한 가상화폐/암호화화폐/분산장부(블럭체인) 기술은 간편결제 등 단순한 핀테크 기술을 넘어 인프라 수준의 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근 이 기술과 관련해 IBM이 보여주고 있는 행보를 보면 더욱 그렇다. IBM은 지난해 가을 비트코인의 핵심기술인 분산장부 시스템, 즉 블럭체인을 이용해 사물인터넷 아키텍쳐를 만들자는 제안을 발표했으며, 지난 1월 라스베가스 CES에서 삼성과 협업한 프로토타입을 선보였다. Adept 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였다. 사물인터넷의 골조를 비트코인 기술로 구현하겠다는 대담한 제안이었다.

블럭체인 기술을 활용하겠다는 IBM의 구상은 이게 다가 아닌 듯 하다. 오픈소스인 비트코인의 주요 기술을 이용해 전 세계 주요 통화를 가상화폐로 대체하겠다는 계획 또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통적인 금융기관에 메인프레임을 공급해 온 세계 최대의 금융시스템 회사가 새로운 기술에서 기술금융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다면 과장일까. IBM의 구상이 현실화 되었을 때, 은행 등의 금융기관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게 될까. 변화를 주도 하고 있을까. 변화에 끌려가고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얘기를 되돌려 보자. 인터넷 시대의 AOL이 될 것인가, 소프트뱅크가 될 것인가? 모바일 시대의 이동통신사가 될 것인가, 애플이 될 것인가? 펼쳐질 미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금융기관들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방할 것인가, 개방당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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