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 몸 공부 — 어느 신체 부위까지가 나 인가

실제로 한 사람이 병에 걸리는 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현대의학에서도 정확한 병인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p.16
어지럼증이 생겼을 때 병원을 전전한 적이 있다. 어지럼증의 원인이 워낙 여러 가지라 이비인후과, 내과, 신경과 등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한 병원에서도 이 검사 저 검사 여러 검사를 했었다. 병원에서 검사할 수 있는 것 외에도 스트레스나 과로 등의 다른 요인들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에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과정은 굉장히 스트레스였다. 정확한 병인을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았으면 그 과정들이 조금 덜 힘들었을 텐데, 한 번에 정확한 병인을 찾아내길 바라는 마음에 문제를 밝히지 못할 때마다 좌절감이 들었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의학의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헤모글로빈을 대체할 화합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때문에 아직도 혈액이 부족할 때는 다른 사람의 혈액을 수혈 받아야 합니다. p.85
최근에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연구팀이 장내 유인균(gut microbiome)에서 채취한 세균 효소(bacterial enzymes)를 이용해 혈액형에 관계없이 누구나 수혈을 받을 수 있는 ‘유니버셜 블러드(universal blood)’를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https://www.sciencetimes.co.kr/?news=만능-수혈-가능-유니버셜-블러드) A, B, AB형의 혈액형도 O형처럼 모두에게 수혈 가능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 또한 누군가의 혈액을 수혈받아야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후에도 기술적 한계가 여전하지만, 또 이 책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상용화될 만한 기술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심장을 이식하려면 공여자의 심장이 박동하고 있어야 합니다. 심장이 멈춘 상태, 즉 완전히 사망한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심장을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세계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어요. p.93
위의 구절은 과학이 과학으로만 존재할 수 없고 윤리, 정치, 법, 철학 등과 함께 존재해야 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신체의 어느 부분까지를 ‘나’라고 정의 할 수 있을까? 옛날에는 혈액도 ‘나’라고 정의됐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혈액이 나와 내 가족을 나타냈다. 현재에 와서는 수혈받아 다른 사람의 피로 싹 바꾼다고 해도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수혈 초기에는 이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근래에도 심장이 ‘나’라고 정의되었다. 심장을 마음으로 여겨 ‘나’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심장이 뛰는 것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뇌의 역할이 알려지면서 뇌사를 죽음으로 보고 심장이식을 시행했다. 더 이상 심장이 ‘나’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야말로 궁극적인 ‘나’일까? 최근에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뇌 이식을 해서 성공했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물 대상의 뇌 이식 실험에서는 면역반응으로 인해 한 달 내에 죽었다고 한다. 또한, 뇌를 이식한다기보다는 머리를 이식하는 게 가능한 상황이다. 무엇을 ‘나’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이식 수술의 명칭도 ‘뇌’를 이식했다고 해야 할지, ‘몸’을 이식했다고 해야 할지 명칭이 달라진다.
운동선수가 일생을 바쳐 이용한 근육이나 관절은 ‘그’의 자아의 일부라고 할 수 없을까? ‘뇌’도 기억을 저장하는 소프트웨어 측면의 부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하드웨어적으로 보고 ‘나’가 아닌 걸까? 기억을 ‘나’라고 정의하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나’가 아닌 걸까? 기억을 가진 뇌 쪽을 산 상태로 한다면, 그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몸은 사망 신고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몸을 산 상태로 하고 뇌 쪽을 사망했다고 해야 할까? 재산은 뇌를 가진 쪽으로 옮겨야 할까? 몸을 가진 쪽으로 옮겨야 할까? 아니면 두 사람이 하나로 묶인 팀워크로 봐야 할까? 간이나 콩팥 등의 이식과 달리, ‘자아’라고 정의된 뇌나, ‘나’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몸은 어느 쪽도 우선이라 하기 어려워 보인다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윤리적 논의를 거쳐 법제화하면 다시 한쪽이 분명한 삶으로 느껴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