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채식주의자 — 변태

이 소설은 채식주의자로 명명된 영혜를 그의 남편, 그의 형부, 그의 언니 인혜의 시점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였다. 영혜는 각 시점에 따라 변태한다.
변태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 1. 본래의 형태가 변하여 달라짐. 2. 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 3. <동물>성체와는 행태, 생리, 생태가 전혀 다른 유생의 시기를 거치는 동물이 유성에서 성체로 변함 4. <식물>식물의 뿌리, 줄기, 잎 따위의 기관이 본래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변하여 그 상태로 종(種)으로서 고정되는 일. 5. 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이다.
남편의 시점에서 영혜는 육식동물에서 초식동물로 변태하고, 그의 형부의 시점에서 영혜는 초식동물에서 식물의 외향으로 변태하고, 그의 언니의 시점에서 영혜는 외향만이 아닌 내향까지 식물로 변태한다. 영혜의 변태는 “폭력에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무라자, 그녀는 찌는 듯한 더위에 조끼를 겹쳐 입는 것으로 브래지어를 대신했다. 답답해서, 브래지어가 가슴을 조여서 견딜 수 없다고 아내는 변명했다. p.12
영혜는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폭력으로부터 저항한다. 영혜는 가부장제를 따르는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을 따르는 삶을 거부했다. 아버지 말을 따르고, 남편에게 고기 밥상을 차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삶을 거부했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아버지가 강제로 먹이려는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 밥상을 차렸다. 남들 다 그렇게 산다는 말로 자신을 착취하고 옥죄는 폭력적인 삶을 육식에 빗대어, 육식을 거부한다.
“ 고기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냄새가 나.” p.24
영혜는 “착취”라는 폭력으로부터 저항한다. 영혜는 고기 냄새가 난다며 남편의 잠자리 요구를 거부한다. 남편을 육식동물로, 본인은 초식동물로 규정하는 것을 보여준다. “4. NewPhilosopher 상품화된 세계속의 인간 — 보이지 않는 죽음”에 언급했다시피 육식을 한다는 것은 그 동물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다. 영혜도 이처럼, 육식을 다른 생명을 살생하는 착취로 이해한다. 그렇게 육식동물인 남편이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거부한다. 육식동물인 남편은 초식동물이 된 아내마저 강간으로 착취하지만, 착취하려는 손길에 저항한다. 영혜는 육식이라는 착취의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동시에, 육식동물로부터 착취의 객체가 되기를 거부한다.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 p.36
영혜가 동물을 살생하지 않는 것에서 식물을 살생하지 않는 것으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을 보며,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살생을 피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영혜는 자신을 살생하려는 남편과 주변인에게서 피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남편과 주변인을 죽이고 싶었기에 살생을 피한 것 아닐까. 초식동물이 된 영혜가 자신의 손목을 긋고, 식물이 된 영혜가 미음을 거부하며 죽으려고 한 것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 방법이 없었던 것 아닐까 싶다. 육식동물의 착취를 멈출 수 없는데,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을 감히 죽일 수 없으니 자살로 그 착취의 고리를 끊고자 한 것이 아닐까.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p.19 (영혜)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p.22 (남편)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p.84 (형부)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p.200 (언니)
영혜만 변태하는 것은 아니다. 남편도 결혼을 파기하며 기혼자에서 미혼자로 변태(본래의 형태가 변하여 달라짐)하고, 형부는 영혜와 성관계를 하며 변태(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가 되고, 언니는 힘든 삶을 버티면서 변태(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한다. 그들은 각자의 욕망에 의해 변태했지만, 그들 모두 영혜를 통해 자신의 삶이 자신의 욕망이 아니었던 것과 서로를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 모두가 영혜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규범에 따라 살아왔다. 규범이 규정한 대로 살아온 그들의 삶이 자신이 욕망한 삶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영혜를 시작으로 각각 자신이 자신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는다.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사회는 불편해한다. 여성이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을 많은 사람이 불편해 하는 것처럼.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성의 등장은 브래지어를 해야만 한다는 규범을 따르는 사람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성은 변태(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가 되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성을 변태(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가 쳐다본다. 그렇게 규범 밖에 서면 변태가 된다. 하지만, 사실은 브래지어를 하는 여성이 변태(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일수도, 브래지어 하지 않은 여성을 쳐다보지 않는 남성이 변태(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일 수도 있다. 물론,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성을 쳐다보는 것을 변태가 아니라고 정의해도, 시선 강간이라는 폭력이니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이다.
나에게 편하고 당연한 규범이 누군가에겐 삶을 옥죄는 폭력일 수도 있다.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대신 다름으로 보자. 그것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면 공존해보자. 남들처럼 살기를 요구하는 것이 사실은 요구하는 자와 요구받는 자 모두에게 폭력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