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스레브레니차의 학살

1992년 2월 21일.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741호에 근거하여 국제연합 보호군- UNPROFOR이 결성되었다.
이들에게는 12개월간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감시하고 난민을 보호하는 임무가 주어졌으며, 1993년 6월 4일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836호 통과 이후에는 보스니아-사라예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일대까지 작전 영역이 확대되었다.
UN 특사 사이러스 벤스와 유럽특사 데이비드 오언은 현지 정권과 협상하여 담당구역 내에 UNPROFOR 이 감시하는 안전지역을 설치했다.
안전지역은 UNPROFOR 병력이 직접 주둔하는 보호시설로 보스니아의 5개 도시와 그 외 5개 지역에 설치되어 주변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집단폭력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런 안전지역 설치는 UN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고, 다른 대부분의 ‘최초’들이 그렇듯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당장 안전지역을 보호해야 할 UNPROFOR 의 규모와 장비부터 불충분했다. 최초 인가병력은 10400명 뿐이었고 이후 24000명까지 늘어났지만 각 안전지역에는 최대 1000여명 내외-대부분 수백명 정도의 병력만이 할당되었다. 개인화기와 경장갑차 정도로 무장한 병력들은 지역 치안과 경비 이상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반면 최대의 위협인 구 유고 연방군은 1992년까지 17만명의 정규병력을 유지했으며 51만명의 훈련된 예비군 동원이 가능했다. 또 낡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전차나 장갑차들을 운용할 수 있었다. 즉 어떤 형태로든 유고 연방군이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면 현지의 UNPROFOR 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UN과 세르비아에 관여한 국가들은 여전히 위협에 둔감했다. 이들은 실질적인 난민 보호보다는 정치적 협상에 매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대의 주 임무와 배치지는 10회 이상 바뀌고 사령관도 네 번이나 교체되는 등 현지 주둔 부대의 속사정도 혼란스러웠다.
병력을 파견한 국가들도 자국 병력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파견된 부대에게 소극적인 자위차원의 임무 이상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결국 UNPROFOR 는 핑크 존이라 불리는 구 유고 연방군 관할지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며 안전지역의 관리에 매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인 락토 믈라디치 는 UNPROFOR 군을 UN “Self” PROFOR (UN “자기”보호군) 이라며 조롱하곤 했다.

스레브니차에서 원치않은 주역이 되어버린 네덜란드는 UNPROFOR 소속으로 약 400명의 전력을 파견하였으며, 이중 150여명의 병력이 이슬람 집단거주지역이자 UN 이 안전지역으로 설정한 스레브레니차 인근에 주둔했다.
안전지역으로 설정된 스레브레니차에는 4만명 가량의 보스니아 출신 이슬람계 난민들이 밀집해 있었고, 세르비아 민병대는 수시로 안전지역인 스레브니차에 위협을 가했다.
1994년 2월에는 안전지역에 세르비아 민병대가 발사한 다수의 박격포탄이 낙하해 58명이 사망하고 142명이 부상을 입었었으며, 심지어 안전지역 내의 UNPROFOR 측 무기고가 약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별다른 장비가 없는 UNPROFOR 측으로서는 대응다운 대응을 할 수 없었다.
1994년 11월에는 사라예보 외곽에 주둔중이던 UNPROFOR 소속 병력 250명과 보스니아 동부지역을 이동중이던 영국과 네덜란드 소속의 수송부대 병력 164명이 세르비아 민병대의 기습으로 억류되어 포로 신세가 되었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그와 동시에 안전지대로 선포된 비하치 시에 전차를 동원해 맹공을 가했으나, UNPROFOR 측은 인간 방패 신세가 되어버린 다국적군을 우려해 반격을 포기했다. (엄밀히 말해 반격을 수행할 여력도 없었지만)
UNPROFOR 의 무력을 직접 확인한 세르비아 민병대는 1995년 이후 본격적으로 스레브레니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7월 9일 네덜란드군이 관할하는 안전지역 초소 하나가 세르비아 민병대의 기습을 받아 주둔병력 30명이 포로가 되었고,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1명도 네덜란드군 지역으로 도주하다 이슬람계 민병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당시 스레브니차 주둔 네덜란드군 사령관이었던 톰 카레만스 대령은 경비 강화를 요구하는 이슬람계 민병대와의 회견에서 “곧 NATO 의 공습이 있을 것” 이라며 민간인들을 진정시켰다.
카레만스 대령은 다음날인 7월 10일에 세르비아 민병대에 대한 공습을 요청했지만 사령부는 공습요청 서류의 작성 양식이 잘못되었다며 공습요청을 반려했고, 결국 카레만스 대령은 다시 “UN 소속 네덜란드 공군을 통해” 공습을 요청해야 했다.
다음날인 7월 11일. 네덜란드군 소속 F-16 두 대가 나타나 공습을 가했지만 세르비아 측이“추가적 공습이 있을 경우 30명의 네덜란드군 포로를 사살한다” 고 경고함에 따라 공습이 중단되었다.
공습이 중단되는 것과 동시에 드리나 부대라 불리는 락토 믈라비치 휘하의 세르비아계 민병대 4만명이 스레브레니차에 진입했다. 민병대가 동원한 중장비는 T-34나 M18 헬켓 등 낡은 차량들 뿐이었지만 인질로 잡힌 자국 병력으로 인해 공습이 봉쇄된데다 마땅한 대전차 화기나 중화기를 보유하지 못한 네덜란드군은 낡은 고철더미조차도 상대할 수 없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주둔지에 노약자 및 여자들을 수용하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 네덜란드군은 주둔지에서 “반군으로 징집될 우려가 있는 남성” 을 내놓으라는 민병대의 요구를 수용하는 치욕까지 겪어야 했다.
네덜란드군을 묶어둔 채 스레브레니차 일대를 민병대는 곧 인종청소에 나섰다. 민병대는 스레브레니차 일대에서 5일에 걸쳐 이슬람계 남성 7500–8000명을 납치해 학살한 뒤 대형 트럭과 중장비를 통해 시신을 암매장했다. 그 지옥같은 5일 동안 UNPROFOR 소속의 네덜란드군은 2차대전 이후 유럽 세계 최악의 대량 학살 장면의 방관자로 남았다.
이 사건이 보도된 이후 각국은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학살을 방치한” 네덜란드에게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전쟁기록연구소(NIWD)도 2002년 정부제출 분석보고를 통해 “군과 정부가 대규모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상황을 인지하고서도 현지의 경고를 수차례나 무시한 채로 소수의 병력을 최소한의 중장비도 없이 파견했다” 는 사실을 강력히 비판했다.
NWD 의 보고서 제출로 인해 EU 의장국으로 선출되어 외교적 상종가를 달리고 있던 당시 네덜란드 내각은 학살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를 걸의했다. 이를 두고 영국의 파이넨셜 타임스는 “네덜란드의 용기” 라고 격찬했지만 이 용기있는 총사퇴 이후 스레브레니차에서 살아난 피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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