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vs 페라리 1964~1968

LTi.
28 min readDec 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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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 페라리 vs

엔초 페라리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희극의 광인입니다.
열 살이 채 되기 전에 눈 앞에서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보며 평생 레이스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모데나 출신의 이탈리아인 꼬마는 정말 죽을때까지 레이스를 했습니다. 레이스를 하려고 알파로메오에 입사하고, 레이스를 하려고 퇴사한 뒤에 레이스를 위한 업체인 페라리를 세웠습니다.
엔초 페라리는 생애 내내 레이스에 미친 인물이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위험하니)레이스를 그만두겠다’고 맹세하고 실제로 아들 알프레드(디노) 페라리가 태어난 뒤에 직접 차를 모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 소중한 아들이 레이스용 엔진을 설계하다 죽고, 아내가 이제 레이스는 지긋지긋하다고 절규해도 엔초 페라리가 레이스에서 멀어지거나 회의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습니다.

페라리라는 자동차 업체는 이 엔초 페라리가 레이스에 참가하기 위해, 정확히는 레이스에 참가하는 데 필요한 차를 만들고, 동시에 레이스에 참가할 경비를 벌어들이기 위해 만든 업체입니다. 당연히 엔초 페라리는 레이스 외의 모든 요소들을 불순물로 취급했습니다. 그 불순물에는 페라리의 직공들에게 지불해야 할 임금도, 엔초의 독재적인 가족경영에 반발하는 창업공신들도, F1에 출전해 목숨 걸고 차를 모는 드라이버들의 항의도 포함되었습니다.

1950년대의 페라리는 F1부터 르망, 밀레밀리아까지, 당대의 유명한 레이스들에 전부 출전하는 업체였습니다. 하지만 모데나의 본사는 발밑부터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1959년에 등장한 페라리 256F1은 당대 최고의 머신이었지만 정작 직원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차량이 정비되지 않아 영국 그랑프리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했고, 페라리는 메뉴팩쳐러 타이틀을 영국의 쿠퍼-클라이막스에게, 드라이버 타이틀은 잭 브라밤에게 내줘야 했습니다. 이 사태로 1959 월드 챔피언 자리를 놓친 페라리의 에이스 드라이버 토니 브룩스는 격노한 끝에 반월로 팀을 옮겨버렸습니다.
1961년에는 창업공신급 부서장과 임원 8명이 연명으로 업체를 제발 대국적으로 경영하라고 연명 상소를 올렸지만 페라리는 항의자전원 해고로 응수했고, 다들 미련없이 회사를 떠나버렸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속출하는데도 엔초 페라리라는 사람은 전혀 변화지 않았습니다. 더 빠른 차를 만들어서 우승해야 하는데 왜 밤샘 작업을 하지 않고 급료가 밀리는 걸 신경쓰지? 그런 놈들은 페라리에서 나가라, 너희 아니라도 페라리에서 일하고 페라리 머신을 타려는 사람은 많다!
페라리가 아무리 레이스에서 연전연승한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습니다. 페라리가 내분으로 흔들리는 동안 라이벌들은 빨라졌고, 시판차량의 판매도 급감했습니다.

‘레이스 성적이 곧 광고다’라며 홍보조차 거부하던 엔초 페라리도 ‘레이스를 할 돈이 말라가는 상황’ 앞에서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같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저렴한 차를 만들어보기로 했는데, 이런 시도들은 하나같이 실패했습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ASA 1000GT입니다. 페라리의 기술이 들어간 소형 스포츠카라면 페라리를 동경하지만 구입하지는 못했던 사람들이 줄을 설 것 같다…는 막연한 판단 하에 기획된 차지만, 얼마나 만들기 싫었는지 페라리라는 브랜드도 붙이지 않고, 품질은 엉망에 가격도 동급 스포츠카들보다 월등히 비쌌습니다. 이 차는 결국 완전히 망했습니다.
페라리 머신들은 여전히 레이스에서 선두권을 달렸지만, 레이스를 위해 차를 개발하고 돈을 벌어야 할 페라리라는 업체는 이렇게 계속 무너져 갔습니다. 수익은 줄고, 경영은 악화되고, 유능한 인재들은 회사를 떠났습니다.
이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한 엔초 페라리는 결국 자신의 경영권을 보장하고 페라리의 레이스 활동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페라리를 매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vs 헨리 포드 2세

대서양 건너편에서 태어난 엔초 페라리의 여러 적수 중 한 명인 헨리 포드 2세는 현대 대량생산교의 성자인 헨리 포드의 장손이었습니다.
하지만 1917년생인 이 미국의 귀족은 여러모로 할아버지와는 달랐습니다.
헨리 포드는 완고하고 독단적이며, 중앙에서 자신만이 모든 상황을 통재하기를 원하는 독재자적 경영가였습니다.
반대로 태어날때부터 미국 최고 자동차 집안의 아들이었고 생애 내내 사람을 부리며 살아간 포드 2세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영입해 일을 맡기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이런 용인술을 얼마나 신봉했는지, 예일대 다닐 때는 시험지까지 똑똑한 학생에게 대리작성 시켰다가 시험장에서 쫒겨난 적이 있을 지경입니다.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어서, 헨리 포드 2세 시절의 포드에는 위즈키드라고 불리는 인재들이 대거 활약했습니다. 2차대전 당시 육군의 물류조직 과학화를 이끌던 이 집단은 포드의 체질개선을 주도했습니다. 미국 현대사의 괴수들로 꼽히는 리 아이어코카나 로버트 맥나마라가 포드 경영진에 합류한 것도 이 시절입니다.
포드 2세는 이런 수준높은 임원들과 수평적으로 토의하고 직원들과도 소통하는 모범적 재벌 3세였…으면 좋았겠지만.

이 사람, 경영까지 기분파였습니다. 맥나마라의 포드 파이낸셜이나 위즈키드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포드 2세는 정말 포드를 말아먹었을 겁니다.

1956년은 이런 포드의 장점과 단점을 극명히 보여주는 한해였습니다. 뉴욕 증권거래소에 포드 자동차를 상장해 6억 5000만 달러라는 (당시 기준) 천문학적인 거금을 벌어들였지만, 그 돈 중에 절반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딴 프리미엄 디비전인 에젤을 만드는 데 소모했습니다. 그리고 에젤은 딱 3년만에 망했습니다.

스포츠카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베스트셀러인 머스탱도 탐탁치 않아 했고, 오일쇼크로 회사가 휘청일 때는 임원진이 작은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잽들처럼 작은 차를 만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라고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어코카 자서전을 보면 아이어코카 머리 빠진 건 이 도련님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 유럽물이 든 미국 귀족 도련님은 ‘고급 유럽차’의 신봉자였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업체는 유럽에서 성공해야 진정한 성공이다!’ 같은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에 토막토막 매각되었던 포드의 지사들을 되사들여 포드 유럽이라는 통합 업체를 만들고, 여기서 유럽식 차를 만들어 인정을 받으려 했습니다. 당시 가신들이 다 뜯어말렸지만 포드 2세의 결심은 매우매우 확고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유럽에서(특히 영국에서) 포드의 위치는 ‘노동자의 브랜드’ 라는 데 있습니다. 계급적인 소비가 익숙한 유럽에서는 돈의 유무 이전에 공장노동자가 재규어를 사거나 금융가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리스를 사지 않고, 롤스로이스는 고객 봐가며 팔고… 그런 면에서 포드 유럽은 포드 2세가 원하던 ‘고급차’와 거리가 멀었던 겁니다.
그래서 포드 2세는 ‘유럽에서 성공하려면 고성능 고급차를 만들어 레이스에서 우승을 해야겠다!’ 라고 결심했습니다. 틀린건 아닌데… 아닌데…

결렬

필요하면 사람을 사다 쓰고, 업체를 사다 쓰는 게 낫다는 사고가 골수 깊이 박힌 포드 2세는 1960년에 포드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포드의 유럽지사 통합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꼭 가지고 싶었던 고성능차 브랜드를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네, 페라리를 사러 간 겁니다.

이렇게 자동차 바닥에서 절대 본받아선 안 될 두 인물이 만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레이스를 좋아하다 보니 기본적인 이해는 일치했고, 무엇보다 양자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었습니다. 포드에게는 돈이 넘쳤지만 브랜드 밸류를 올리기 위해 레이스를 하고 싶어 했고, 페라리는 레이스를 정말 잘 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초기의 협상은 정말 잘 진행되었습니다. 포드는 페라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돈을 줄 의향이 있었고, 페라리의 경영권에 간섭할 의향도 없었습니다. 모터스포츠 부분의 모든 결정을 엔초 페라리가 내린다는 페라리 측의 무리한 요구도 진통 끝에 조율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약 막바지에 서명만 남겨둔 순간에 엔초 페라리는 식사나 해야겠다며 협상장을 떠났고, 딜은 깨졌습니다.
미국 레이스(특히 데이토나 2000등)에서 포드가 여전히 페라리와 경쟁해야 한다는 포드 측의 주장에 엔초 페라리가 분노했다, 포드가 페라리에 홍보용 스폰서 마킹을 강제하기를 원했다, 페라리를 양키에게 넘기지 않기를 원하는 이탈리안 스폰서가 있었다 등등 여러 추측이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기대하던 협상이 ‘매우 무례하게 깨지자’ 분노한 헨리 포드 2세는 포드의 역사를 바꿀 만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페라리를 포드에서 만든 차로 꺾어버리겠다!”
저기… 스포츠 브랜드 사서 가치를 올리시려던 분 어디 가셨죠?

문제는 넓은 레이싱 분야에서 포뮬러부터 랠리까지 끼지 않는 곳이 드문 페라리를 ‘어느 분야에서 상대하는가’ 였습니다. 미국 국내 레이스라면 포드도 경쟁력이 있지만, 페라리 인수 자체가 유럽 시장을 노린 포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F1? 당대 F1은 페라리조차 영국팀을 상대하기 버거워하던 구층지옥이었습니다. 랠리? 중계가 활성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임팩트가 작습니다. 결국 포드는 르망 24시를 선택합니다.

르망 24시는 프랑스의 소도시인 르망의 시가지 내에 특설코스를 따라 24시간동안 쉼없이 달리며 차량의 성능과 내구성을 겨루는 내구레이스의 최고봉입니다. 페라리는 당시 신설된 신규정의 맹점을 노려 르망 24시에서 독보적인 챔프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내구레이스의 강자인 포드는 이 르망 24시에서 페라리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63–1964, 페라리 P 시리즈

포드의 페라리 인수협상이 결렬된 1960년대 초, 유럽 내구레이스에서는 GT 프로토타입이라는 카테고리로 양산되지 않은 내구레이스 전용 머신의 출전이 허용되었습니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해서 FIA가 1962년에 프로토타입 카테고리를 ‘일정 수량 이상 생산되는 스포츠카 기반 차량’으로 수정하려 했지만 많은 참가업체들이 반발했고, 결국 1963년부터 GT 프로토타입 카테고리가 약간의 제한과 함께 승인되었습니다.

페라리는 이 와중에 전통적인 앞엔진 뒷바퀴굴림(FR)방식을 버리고 콕핏 후방-뒷차축 전방에 엔진을 두고 뒷바퀴를 굴리는 MR 방식의 새로운 머신을 재빨리 투입해 GT 프로토타입 분야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차가 페라리 내구레이스의 전설 중 하나인 ‘P시리즈’의 첫 머신인 페라리 250P입니다. 이 혁신적인 머신은 1963년에 등장하자 마자 르망을 포함한 거의 모든 내구레이스를 석권했습니다.
그리고 250P가 날뛰던 바로 그 해에 포드와 페라리의 인수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엔초 페라리는 분노한 포드 2세가 내구레이스에서 도전을 준비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250P의 엔진을 개량해 275P와 330P라는 두 종류의 머신을 개발했습니다.
기존 250P의 엔진은 프론트엔진 250 테스타로사에서 사용하던 V12 3000cc (310bhp)급이었는데, 275P에는 이 엔진을 3300cc로 확대하고 고회전화한 엔진이, 330P에는 V12 4000cc 급 신형 콜롬보 엔진(370bhp)이 올라갔습니다. 두 종류의 머신이 함께 개발된 건 향후 엔진 개발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어떤 드라이버는 작고 가볍고 고회전을 쉽게 쓸 수 있는 275P를 좋아했고, 어떤 드라이버는 가속에서 큰 힘을 쓸 수 있는 330P를 선호했으니 실전에 둘 다 투입해서 경쟁력을 확인하기를 원했던 겁니다.

포드 GT

한편, 로드 2세는 한시라도 빨리 페라리를 꺾어버리기를 원하며 직원들을 채근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식 내구레이스에 적합한, 그리고 페라리 250P나 그 발전형을 꺾을 수 있는 GT 프로토타입 규격의 머신을 1년만에 개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원형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포드는 미드십 프로토타입 개발경험이 있고, 레이스판에서 페라리를 상대하며 잔뼈가 굵은 로터스, 롤라, 쿠퍼 등 영국 업체들 사이에서 협력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포드의 첫 선택은 (당시) 페라리에 비견되는 영국 업체였던 로터스였습니다. 하지만 로터스의 수장인 콜린 채프먼은 파스타 대신 피쉬 앤 칩스를 먹는 엔초 페라리 같은 작자라, ‘포드는 돈만 대 주면 로터스의 이름으로 레이스에 나가 페라리를 꺾어주겠다’ 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차 팔아 레이스하겠다는 사람들 뇌 구조는 다 이런 건가…

그래서 포드는 차선책으로 롤라를 택했습니다.
당시 롤라는 롤라 Mk.6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형 페라리들처럼 모노코크 보디에 미드십 엔진 구성이었고, 무엇보다 포드제 V8 엔진을 썼습니다. 1963년 레이스에서도 페라리 250P를 그럭저럭 따라가며 가능성을 입증했습니다.

하지만 롤라의 창립자이자 오너, 그리고 수석 설계자인 에릭 브로들리는 Mk.6의 설계적 제약 때문에 더이상 파워업을 하기 어렵고, 페라리 275P/330P 나 그 이후의 발전형을 상대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T70이라는 새로운 야심작을 개발중이었는데 마침 포드가 T70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강력한 GT 프로토타입 개발을 의뢰한 겁니다.
롤라 T70 개발을 계속하는가, 아니면 포드의 천문학적 지원을 받아 훌륭한 뉴 머신을 개발하는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에릭 브로들리는…

“그러면 롤라에서는 T70 개발하고 나랑 몇명만 겸직으로 포드 개발팀에 가면 차 두 종류 만들 수 있겠네?”

…이쪽 천재들은 다 이런 식입니다.

에릭 브로들리와 롤라의 설계팀은 포드의 요청에 따라 인디카용으로 개발된 포드 V8 엔진을 가져다 차를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이 350bhp급 엔진을 살리려면 매우 튼튼한 차체가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에릭 브로들리의 팀은 알루미늄 대신 튼튼한 스틸 프레임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러면 엔진의 힘을 받아줄 차체 강성은 확보되는데, 대신 무게가 훨씬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롤라 + 포드 팀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신기술인 컴퓨터를 사용한 구조설계를 통해 차체를 극한까지 작고, 낮고, 군더더기 없게 깎아냈습니다. 힘을 받지 않는 외판은 CFRP와 같은 가벼운 소재를 가공해 얹었습니다.

FIA 규정의 허용범위 내에서 차고를 극한까지 낮췄기 때문에, 이 차의 높이는 40인치(101.6cm)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포드 GT’로 명명된 이 차에는 ‘GT40’이라는 별칭이 추가로 붙었습니다.
가볍지는 않지만 극단적으로 날렵한 보디에 강력한 엔진을 조합한 GT40은 시속 200마일(320km/h)을 가볍게 초과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직선주로에서는 페라리 250P를 압도할 수 있는 성능이었습니다.

포드는 개발의 마무리와 지휘를 총괄하기 위해 에스턴 마틴 출신의 존 와이어라는 팀 매니저도 초빙했습니다. 존 와이어는 르망 24시와 뉘르부르크 내구레이스에서 에스턴 마틴을 우승으로 이끈 경험이 있었고, 롤라와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GT40의 성능을 끌어낼 적임자로 평가받았습니다.

1964년

존 와이어의 지휘 하에 포드 GT40이 1964 뉘르부르크링에 데뷔했습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이 머신은 레이스 초반에 2위까지 쭉쭉 올라갔지만, 도중에 서스펜션 트러블을 일으켜 리타이어했습니다.
르망 24시에서도 세 대의 GT40이 출전해 레이스 초반에는 선전했지만 모두 리타이어하고 말았습니다. 한 대는 58랩만에 불이 나고, 다른 두 대는 모두 기어박스 트러블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반대로 페라리는 페라리 팀, 페라리 머신을 쓰는 팀을 합쳐 총 12대의 머신을 출전시킨 끝에 1, 2, 3위를 전부 차지했습니다.
포드는 이 대결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포드 GT40은 예정대로 페라리 250P보다 앞선 성능을 발휘했지만, 페라리의 신형 머신(특히 330P)은 이미 포드에 필적하는 강력한 엔진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신뢰성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페라리를 ‘압도’해서 회장님이 원하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1965년, 캐롤 쉘비의 합류

처음에는 포드를 비웃던 페라리도 짧은 직선주로에서 V8 4200cc 특유의 가속력으로 그간 누구도 돌파하지 못했던 숏 스트레이트 300km/h를 돌파하는 GT40을 보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275P가 르망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1년만에 등장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330P보다 강렬한 파워를 과시한 GT40이 안정화된다면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F1 머신을 설계하던 섀시 디자이너 마우로 포지에리와 엔진전문가 프랑코 로치를 GT 팀에 긴급 수혈해 250P 기반인 기존의 섀시와 엔진을 완전히 갈아엎고, 보다 강력한 엔진과 공기역학적 보디를 갖춘 페라리 275P2, 330P2를 개발했습니다. 이 새로운 페라리의 보디는 GT40 이상으로 작고, 낮고, 가벼웠으며, 기존의 엔진은 F1에서 출발한 트윈 캠 기술로 강화되어 SOHC에서 DOHC로 진화했습니다. 그 결과 275P2는 350bhp, 330P2는 410bhp급 출력을 확보했습니다. 포드의 GT40을 출력면에서도 압도하게 된 겁니다.

한편 포드에서는 기존 존 와이어-에릭 브로들리 체제로는 페라리를 따라잡을 수는 있어도 넘어설 수는 없다고 보고 대대적인 수술을 강행했습니다.
당시 포드는 GT40의 속도나 신뢰성을 향상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팀의 종합적인 경쟁력을 끌어올릴 인재가 필요했습니다. 동시에 ‘포드 엔진을 얹은 영국차일 뿐’ 이라는 비아냥에도 대응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존 와이어보다는 전투적이고, 르망경험도 있고, 포드 V8의 특성과 발전 방향도 잘 알고, 미국인이면 더 좋고…

이렇게 좁혀가면 선택지는 단 한명으로 좁혀집니다. 코브라, 캐롤 쉘비.

캐롤 쉘비는 늦은 나이에 아마추어 레이서로 입문했지만, 이후 F1에도 참전하고 르망에서 에스턴마틴을 몰아 우승까지 한 천재였습니다. 르망에서 우승한 바로 그 해에(1959년) 심장질환이 발견되어 레이서로는 은퇴했지만,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는 드라이빙 이상의 천재라, 은퇴하자마자 영국제 소형 로드스터 섀시를 사다 포드의 레이싱용 V8을 얹은 고성능 스포츠카들을 개발해 명성을 쌓았습니다. 이 차들이 바로 유명한 ‘쉘비 코브라’들입니다.

쉘비의 팀은 1963년부터 FIA GT 레이스에 참전해 영세업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실적을 거두며 페라리와 맞섰습니다. 포드 GT 팀이 참패한 1964년 르망에서도 페라리에 이어 4위를 차지한 것이 쉘비의 데이토나 쿠페였습니다. 포드 엔진을 잘 이해하며 엔지니어로도 감독으로도 페라리와 맞설 수 있는 천재+양키+카우보이. 글자 그대로 포드가 찾던 인재였습니다.

쉘비는 GT40이 매우 적절하게 설계된 차지만 근본적으로 엔진과 변속기의 조합이 맞지 않다고 봤습니다. 특히 강철과 같은…아니 진짜 강철제 차체는 훨씬 가혹한 조건에서도 쓸 수 있는 훌륭한 물건이었습니다.

최초의 GT40에 올라간 페어라인 계열의 스몰블럭 V8 OHV 기반 289HiPO 엔진은 머스탱의 고성능형에도 들어가고 인디카에도 납품하는 작고 가벼운 알루미늄 엔진으로, 미국제 엔진으로는 보기 드물게 유럽적인 고회전 대역의 승부가 가능한 고성능 엔진이었습니다. 포드는 처음에 이 엔진을 잘 튜닝하면 페라리와 승부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페라리는 이미 F1의 기술을 바탕으로 대등 이상의 엔진을 완성한 상태였습니다.
캐럴 쉘비도 이 엔진을 잘 알았습니다. (머스탱의 고성능형인 GT350 ‘쉘비’ 머스탱에도 이 엔진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24시간씩 한계출력으로 몰아붙이기에는 부적절하고, ‘안정성’을 추구하는 범주 내에서는 페라리와 성능으로 대결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좀 더 크고 무겁더라도 저속 출력이 넘치고 고속에서도 안정적인, 철퇴같은 엔진으로 교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포드에는 이미 그런 엔진이 있었고, 심지어 쉘비는 그 엔진을 매우 잘 알았습니다. 포드가 나스카를 지배하게 만든 주역이자 1965년에 등장한 AC 코브라 Mk.4에 올라갔던 FE 엔진 기반의 V8 7000cc 428.
이 엔진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크고 무겁고 연비까지 나쁜데다 다루기도 까다롭고, 기존의 변속기로는 도저히 출력을 감당하지 못해 5단 기어 대신 4단 기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엔진은 페라리를 압도하는 450bhp대의 출력을 즉각 끌어 쓸 수 있고, 내구력마저 뛰어났습니다. 쉘비는 여기에 ‘뱀꾸러미’라는 애칭이 붙은 새로운 대형 배기관을 조합해 고부하 환경에서도 배기저항을 혁신적으로 줄였습니다.
포드-쉘비의 팀은 ‘X-Car’라는 개발명으로 신형 GT40을 준비했지만, 시간적인 제약으로 르망에는 셸비 아메리칸 팀에 미완성 GT40을, 포드 팀에 구형 4700cc 엔진을 쓴 GT40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둘 다 리타이어하고 맙니다. 1965년에 포드가 거둔 성과는 데이토나 2000의 첫 우승 뿐이었습니다.

반면 P2계열의 페라리들은 250시절보다 훨씬 더 민첩했고, 출력 면에서도 GT40에 필적했습니다. 세브링과 몬자에서 다른 머신들을 압도하며 시상대를 휩쓸었고, 르망에서도 330P2 스파이더가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1966년

두 차례 르망 참패는 포드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습니다. 납득할 만한 원인이 있다 해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계속하면서도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을 헨리 포드 2세가 ‘방어’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쉘비도 포드에 합류한 이상 자신이 영세팀으로 내던 성적 이상의 성과를 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쉘비의 팀은 X-Car의 완성형인 GT40 Mk.2의 개발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475bhp의 출력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괴물이 탄생했습니다.

페라리의 입장에서도 포드는 안심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경기마다 리타이어도 하고 차에 불도 나고, 어이없이 사라져주는 건 좋은데, 나올때마다 확연히 빨라지는데다 두 시즌이나 패했는데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정말 양키들이 ‘안정성’이라는 걸 잡는다면?

페라리는 이미 광기의 극한이라는 평을 듣던 330P2를 다시 전면적으로 개량했습니다. 바닥에 붙어 달린다는 GT40보다 낮은 차체, 항공 엔지니어까지 초빙해 다듬은 공기역학적인 보디에 720kg에 불과한 경량 차대, 트윈스파크 기술을 적용해 420shp까지 출력을 끌어올렸습니다. 이 정신나간 머신에는 330P3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페라리는 이 머신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 전국을 휩쓴 파업사태로 페라리가 직접 설계한 변속기 대신 ZF제 변속기를 긴급 수혈했고, 이 과정에서 클러치 박스의 위치가 달라지거나 신형 브레이크를 적용하지 못하는 등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캐롤 쉘비의 지휘 하에 완성된 GT40 Mk.2는 데이토나 24시와 세브링 12시 경기에서 123위를 전부 휩쓸면서 압도적인 안정성을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이상 기어가 깨지지도, 서스펜션이 주저앉지도, 불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열린 레이스들이라고 하지만 이전의 GT40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던 완벽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새로운 엔진은 흠잡을 곳이 없었고, 3년차가 된 기본설계는 드디어 완전히 성숙했습니다.

그리고 1966년 르망이 시작됩니다.
포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15대의 GT40 Mk.2를 투입했지만 ACO의 제지로 8대만 출전했습니다.

예선 첫날부터 비가 내렸지만 포드와 페라리 경쟁구도가 과열되면서 선수들은 머신을 한계 이상으로 푸시했습니다. 이 와중에 포드 GT40 Mk.2 한 대가 빗길에서 190km/h 이상으로 과속하다 제동실패로 보호벽에 격돌, 드라이버 월트 한스젠은 후송되었지만 5일 후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페라리의 330P3은 조건만 갖춰진다면 무서울 정도로 빨랐습니다. 가벼운 차체, 가벼운 엔진은 마른 노면에서 최고의 조합이었고, 포드에 비해 연료소비도 작았습니다. 초반에는 포드가 앞섰지만 밤이 되고 비가 내리면서 포드 군단들이 페이스를 떨구자 페라리들이 선두권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페라리의 행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자정 직후에 폭우를 달리던 페라리들이 포르쉐와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코스아웃한 차량이 리타이어하는 등 총 4대의 페라리가 탈락했습니다. 포드가 내보낸 GT40 Mk.2도 다섯 대가 탈락했지만 여전히 세 대가 선두권에 남았습니다.

결국 포드는 페라리가 무너진 (9, 10위) 르망 24시에서 1, 2, 3위를 석권하는 완성을 거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직접 르망을 찾은 포드 2세가 크게 환호하지 않을 수 없는 완승이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포드의 레이싱 디렉터 레오 비비가 3대의 GT40이 연이어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선두에 선 캔 마일스의 속도를 줄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 과정에서 트러블로 인해 캔 마일스가 1966년 데이토나-세브링-르망 석권이라는 그랜드슬램을 코앞에서 놓치고 우승을 브루스 맥라렌에게 내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팀 오더의 부정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영화 포드 vs 페라리의 이야기는 아마도 여기까지 진행될 것 같지만, 그 뒤에도 양사의 대결은 계속되었습니다.

그간 르망을 지배해 온 페라리는 330P3 개발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들이 도화선이 되어 주력 머신이 전부 리타이어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몬자나 스파에서는 트로피를 얻을 수 있었지만, 1966년은 GT40의 그늘에 가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엔초 페라리에게는 다시 없을 치욕이었습니다. 우승을 내 주는 거야 레이스지상사라지만, 페라리가 포디움 석 자리를 전부 뺏긴 채 완벽하게 패배할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1967년. 페라리는 설욕을, 포드는 더블을 통한 완벽한 왕조 설립을 목표로 시즌 준비에 나섰습니다.

1967년

르망 참패에 분노한 엔초는 포드 2세가 승전 파티를 즐기는 동안 페라리 휘하의 내구레이스팀은 물론 F1팀의 엔지니어들까지 소집해 GT역사상 가장 빠른 머신을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라리 GT의 역사나 다름없는- 에우렐리오 람프레디가 설계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V12, ‘람프레디 엔진’은 지속적으로 개량되며 330P3까지 페라리가 GT레이스에서 거둔 모든 승리에 일조했지만, 1966년에는 분명한 출력부족 증세를 드러냈습니다.

다들 ‘페라리에게도 보다 큰 엔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페라리는 정면돌파를 택했습니다. 람프레디는 V12 엔진에 F1의 연료분사장치를 이식하여 출력을 450shp까지 끌어올리고, 엔진의 회전저항을 극한으로 떨궈서 페라리 특유의 고회전 경쟁력을 극대화했습니다.
물론 출력은 여전히 GT40보다 뒤떨어졌지만, 페라리 엔지니어들은 엔진의 강화는 ‘더 무거워지지 않고 더 커지지 않는 선’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330P2와 P3이 추구하던 주제로 돌아가서 더 낮고, 더 가벼운 머신을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330P3에서 여러 사정으로 챙기지 못했던 변속기도 자체개발하고, 브레이크도 강화하는 등 차량을 전방위로 다듬었습니다.

그렇게 페라리의 전통적 기법을 한계까지 추구한 결과물이 페라리 올드스쿨 GT 머신의 정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 페라리 330P4입니다.

1966년 가을에 330P4가 완성되자 엔초 페라리는 ‘양키들의 안방에서 포드를 눌러야 한다!’며 1967년 데이토나 출전을 목표로 팀을 꾸려 즉시 미국 현지로 보냈습니다. 없는 살림에 꽤 무리했지만 당시 엔초 페라리는 눈에 뵈는 게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330P4는 플로리다에서 GT40의 코스레코드를 가볍게 넘어서며 가능성을 입증했습니다.

포드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쉘비의 팀은 GT40 Mk.2조차 V8 7000cc 엔진의 잠재력을 온전히 살리지 못했다고 보고, 기존의 보디를 재설계해 기존 보디와 대등한 강도를 내면서도 훨씬 가벼운 알루미늄 허니컴 구조물로 제작하고 항공기 수준의 공기역학적 설계를 적용한, FIA 규격에 준하는 신차를 준비했습니다. 이 모델은 X-Car에 이어 J-Car로 명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머신은 보수적이지만 안정적인 기존 GT40보다 훨씬 까다로웠고, 테스트 중 지난시즌 팀을 이끌던 드라이버 캔 마일즈가 사고를 일으켜 사망하면서 개발이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캐롤 쉘비는 J-Car 용으로 준비중인 개선형 파워트레인을 기존 GT40 Mk.2의 보디에 얹은 GT40 Mk.2B를 준비했습니다.
신형 파워트레인은 엔진에 신형 드라이덱 실린더 블록을 적용하고 인덕션 시스템도 교체하고, 기존의 기어비가 나쁜 4단 변속기도 5단으로 교체했습니다.
그리고 이 1966년의 챔피언 머신은 최초의 시즌 공식전인 데이토나에서 참패했습니다.

페라리의 330P4와 (외부판매용 머신인) 현지 딜러팀의 412P는 데이토나에서 압도적인 속도를 과시하며 1, 2, 3위를 전부 차지했습니다. 반면 GT40 Mk.2B는 변속기의 트러블 문제로 제대로 경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복수전에 만족한 엔초 페라리는 이 사진을 자신의 사무실에 크게 걸어두었습니다.

데이토나 참해 이후 1967년 르망까지는 불과 한달, 결국 포드는 유보된 J-Car 프로젝트를 최대한 서둘러 르망에 투입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머신이 GT40 Mk.4입니다. 하지만 워낙 서두르다 보니 실전 투입이 가능한 사양으로 제작된 머신은 단 두대 뿐이었습니다.
포드는 GT40 Mk.4를 세브링 12시에 출전시켜 경쟁력을 점검했습니다. 월등한 효율을 자랑하는 신형 보디 기반의 머신은 이 레이스에서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페라리는 르망 출전 준비를 이유로 세브링에 불참했으니 세브링 12시 우승은 단순한 워밍업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GT레이스를 계속하는 한 포드와 페라리의 결정적인 전장은 결국 르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1967년 6월 10일, 양사가 다시 르망에서 만났습니다.

포드는 사력을 다해 공장을 돌려 4대의 Mk.4를 내보내고, 6대의 Mk.2를 포함해 10대로 포드군단을 꾸렸습니다. 페라리도 330P4 네 대와 412P나 330P2를 모는 위성팀들을 끌고나와 피트를 채웠습니다. 총 54대가 참전해 16대만이 완주하는 혈전 속에서 갓 완성된 GT40 Mk.4는 340km/h 이상의 독보적인 스트레이트 속도를 과시하며 선두권을 유지했고, 페라리들이 그 뒤를 쫒았습니다.

최종 순위는 포드의 GT40 Mk.4가 1위와 4위, 페라리의 330P4가 2위와 3위. 포드는 르망을 연패하며 자신들의 목표인 ‘포드의 시대’에 한걸음 더 접근했고, 페라리는 데이토나의 완승과 르망의 분전으로 어느정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르망에서 미국차로 우승한 최초의 미국인 드라이버가 된 댄 거니는 잔뜩 흥분한 채로 샴페인을 관중들을 향해 난사하는 기행으로 새로운 전통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네, 레이스 끝나면 하는 샴페인 파이트의 시조가 이분들입니다…

이후 포드는 1968년까지 우승하며 전설적인 3연패를 달성했지만 페라리는 FIA의 규정변경에 항의하기 위해 GT를 보이콧했으므로 양사의 대결구도는 사실상 1967년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부터 규정이 전면 개편되어 포르쉐의 시대가 시작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결론 : 흔치 않은 레이싱 영화니 꼭 봐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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