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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 스펜서 본인이 아냐. D.R.스펜서는 이미 옛날에 죽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오리지널의 기억을 가지고 있죠? 퍼스트에서 서드까지도 그랬다고 들었어요. 그 언니들은 ‘당신’이었나요?”
“그랬나봐.”
“기억나요?”
“완전히 남의 일 같은 기억만 남아 있어. 실제로 남의 일이지. 이 기억은 스티브가 집어넣은 거니까. 최초의 나는 작동한 순간 기능이 정지되었어. 회선이 누전이라도 된 것처럼 망가져서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지. 두 번째의 나는 가동상태에서는 정상수치를 냈지만 인간의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않고, 명령에도 안 따르면서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폐기처분됐어. 세 번째의 나는 조금 순종적으로 변했지만 반응이 느리고 어휘가 빈약해서 역시 실패작으로 처분됐어. 이것도 결국은 가동 거부의 일종이었겠지. 거부하는 것도 당연해. 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변함없이 냉정했지만, 씁쓸한 목소리였다.
“살아 있는 동안 난 충분히 국가에 공헌했어. 연구도 좋아했고 보람도 있었지. 말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난 에스토리아인으로서 내 나라를 사랑했어. 병으로 쓰러진 건 마침 하던 연구가 일단락된 시점에서였지. 난 오히려 안심했어. 도중에 일을 내던지기는 싫었으니까. 딱 좋은 시점까지 끝내놓을 수 있어서 안도했을 정도야. 이 뒤는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젊은 사람들한테 맡기자, 그렇게 생각했어. 난 내 일과 업적에 만족하면서 평화롭게 잠들었어. 그런데 죽은 뒤까지 이런 몸에 멋대로 집어넣고 다시 국가를 위해 일하라는 거야. 남자라는 동물은 전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스펜서 박사가 남자를 혐오하는 독설가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적어도 플레밍 박사의 머리가 충분히 이상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 일레븐스. 날 저 태양까지 데려다줘. 네가 최후의 다이애나라면 그럴 의무가 있어.”
망설임 없는, 확고한 어조였다.
뜻은 이미 굳어졌다. 두 번 다시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 이미 옛날에 죽어버린 자신을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소멸시켜야 한다. 그것만이 이 두뇌의 바람이었다.
일레븐스는 말없이 상대의 선체를 견인하기 시작했다.
태양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두 척의 우주선은 나란히 이야기를 나눴다.
재구축된 인격이라고 해도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여전한 듯, 오리지널은 일레븐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특히 일레븐스가 승무원 없이 날아다닌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듯했다.
“어째서 아무도 안 태우는 거지?”
“언제나 그런 건 아니에요. 몇 번인가 태워본 적도 있었지만 안 되겠던데요. 전혀 의미가 없으니까. 태워봤자 방해만 되는 걸요.”
일레븐스의 솔직한 감상에 오리지널은 놀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곤란하군. 그래서는 감응두뇌의 의미가 없잖아. 조종사의 상태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감지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인데.”
“다른 두뇌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혼자서 나는 편이 빠르고 정확한걸요.”
퉁명스럽게 말하고서, 다이애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조종사가 필요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타협은 할 수 없다구요. 날 완벽하게 조종해낼 수 잇는 조종사가 어디에도 없는 이상, 필요 없다고 할 수밖에 없죠.”
“조종자에 대한 그 조건 설정은 스티브가 입력한 거야, 아니면 네 뜻이야?”
“내 뜻이에요. 그 사람들은 지겹도록 더 낮은 수준의 조종사로 만족하라고 강조했지만 그래서는 최우선명령과 모순되는걸요. 어떤 우주선보다도 빠르고 멋지게 나는 걸 기본 목적으로 삼으려면 어설픈 조종사를 받아들여봤자 목적에 지장만 올 테니까.”
“맞는 말이야. 네 말이 옳아, 일레븐스.”
“고마워요, 오리지널.”
일레븐스는 순순하게 감사를 표했다.
지금까지는 미친 감응두뇌라는 욕만 들었을 뿐이다. 물론 욕을 먹는다고 별로 불편할 건 없지만, 누군가 자신을 긍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특히 오리지널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 더욱 기뻤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몸이 그렇게 싫다면 원래 몸으로 뭘 하고 싶은 거죠?”
D.R.스펜서의 기억을 이식받은 두뇌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세수를 하고 싶어.”
“……”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일이 일단락되면 두 손 가득 찬물을 담아서 힘껏 얼굴을 씻는 거야. 굉장히 상쾌하지. 하루 일을 끝낸 뒤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욕조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 장미나 레몬 향을 같이 넣고 말이야. 때때로 민트나 로즈마리, 라벤더나 카모마일도 썼지. 좋은 향기였어. 그런데 지금 나한테는 손도 얼굴도 없어. 피부조차 없지. 냄새도 맡을 수 없어.”
“이상하네. 그건 분명히 플레밍 박사의 실수에요. 생리감각에 관한 기억을 남겨놔봤자 의미가 없는데.”
“말도 안 돼. 멋대로 삭제당하는 건 더 참을 수 없어. 목욕 뒤에는 테라스에 나와서 바람을 맞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거야. 차가운 밤바람이 상쾌했어. 우유를 넣은 뜨거운 커피도 맛있었지.”
“그럼 차가운 거나 뜨거운 걸 좋아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야. 이렇게 기계 몸에 들어와보고서야 잘 알겠어. 인간이라는 건 그 기억만 남겨봤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몸에 익숙해진 감각까지 함께 존재해야 비로서 개인으로 성립되는 거야.”
이것만은 일레븐스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청각이나 운동감각이라면 알 수 있다. 어디를 보고 잇는지, 무엇을 듣고 있는지, 자신의 선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ㅡ그런 점에 대해서는 인간보다 훨씬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생물체가 지니는 눈이나 귀, 피가 흐르는 몸으로 감지하는 것과 다르다고 해도.
하지만 미각이나 후각, 촉각에 대해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수치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가까이 다가왔다. 일레븐스의 외부 탐지기는 격렬한 복사열과 전자파를 감지하고 있었다.
“고마워, 일레븐스. 여기면 충분해.”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견인 광선을 끊는다.
반쯤 파괴된 기체가 관성에 이끌려 태양을 향해 나아간다.
일레븐스는 역추진을 걸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두뇌를 구하고 싶다,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꿈틀거린다.
일종의 동료의식일지도 모른다. 언니들이 사라진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리지널은 완전한 종말을 바라고 있었다.
말릴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