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자의 시간

의식 1

주체적 존재자로서 나는 인식한다. 그리고 인식을 통해 나는 나 자신임을 안다. ‘안다’는 인식이 의식에 자리 잡는 그 때에 나는 이 세상의 현실에 실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임을 알게 하는 의식의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고자 한다. 특히 문제적 사태 (앞에서는 더욱 그 현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부정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써) 이탈, 또한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외면이 그러하다.

나는 또한 욕망한다. 나는 생각하며 그 생각이라는 사유의 운동으로 인해 나의 욕망은 억압과 분출이라는 혼돈을 오간다. 나의 사유는 욕망이 분출할 때 가장 천박하다. 그러나 그것을 억압할 때는 오히려 절제라는 위선의 칭송을 듣게 된다.

(이에) 투사된 진실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나는 도구로서의 이성 그 자체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회의를 통해 또 다른 존재자인 타자로서 ‘너’라는 ‘나’에 대해 회의적인 추론을 해보고자 한다.

‘너’일 수밖에 없는 너는 인식하는가? 그리고 인식하는 너는 너 자신인가. 너는 너 자신임을 알게 하는 의식의 공간으로부터 끊임없는 이탈, 즉,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유한 존재자인가. 또한 너는 욕망하는가. 너는 생각하며 그 생각으로 인해 욕망의 분출과 억압에 대해 혼란을 겪으며 이에 대해 번민하는가.

나는 이러한 해괴한 비약을 통해 내가 이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름대로 찾아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써나가고자 하는 이 글이 굳이 논리적이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만일 나의 생각이 논리적이고 그러므로 생산적인 어떠한 가치 지향적인 목적을 가져야 한다면 내가 속한 사회의 논리적 생산성을 위한 가치 규범성은 무엇보다 국가 체계에 먼저 그 상식적인 잣대가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혹은 국가라고 말한 체제, 체계 구성원의 의식과 지성의 현실이 과연 ‘그럴 능력이 있는가’라는 회의에 대해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는 매우 심각한 자문자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속한 ‘사회적 의식의 현실’이다.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이고 또한 비상식적인 생산성만 추구하던 폭력적인 어느 때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 비생산적인 야만의 시대에 (지금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냥 생각하는 그러나 거세된 한 마리 짐승일 뿐일 것이라는 자괴감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시간에 비례하여 혹은 우연한 사건, 사고에 의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성적 능력 역시 유한하다. 이러한 비참은 인간의 오류를 매우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만들어 준다. 언제부터인가-그것은 기록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아득한 고대의 어느 때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논리가 등장하고 이 논리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은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 희망은 프로메테우스가 신전에서 훔쳐 인간 세상에 가져다준 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논리의 모든 과정이 반드시 논리적인 결과에 도달하고 맺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단순한 그러나 그 단순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직관에 의해, 우연한 그러나 순리에 의해 당연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사태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진리의 발견보다, 새로운 명제의 창조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인간의 이성은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해 논리적이어야 하는, 최소한 상식적이어야 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태를 이루는 개별 사실에 대한 인식의 기본 문제이다.

Show your support

Clapping shows how much you appreciated Joseph Lee’s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