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죽어 있다”고 확언하는 사울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감히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자, 죽음에서부터 말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_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아직 보지 않은 영화(『사울의 아들』)에 대한 책이지만 저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끈다. "죽음에서부터 말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라슬로 네메시에게 위베르만이 던진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저 한 문장이 조르조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에 남은 자들』에서 던진 문제, 스스로 더는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이들이 겪은 극한의 비극을 증언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박이기 때문이다. 학살 수용소에서 말할 능력을 상실한 존재, 극한의 고통으로 인해서 살아있는 시체가 된 이들 무젤만(이슬람교도의 독일어, 정신적 충격으로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자기 존엄을 지키지 못하게 된 수감자들에 대한 은어)을 아우슈비츠가 보인 비극의 핵심으로 파악한 아감벤은 최악의 고통에 놓인 인간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증언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고민한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미숙 혹은 결여된 자의 증언을 보증하는 '귄위'를 통해서, 고통받은 자들의 존재가 부여한 귄위에 의해 증언하는 자(작가)의 증언이 가능해진다. 반면 위베르만은 '말할 수 없음'을 부정한다. "죽음에서부터 말하는 자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처럼 말할 수 없는 궁극의 조건 속에서도 말의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의 전작인 『반딧불의 잔존』에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권력의 시선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반딧불의 미광(랑시에르의 용법을 빌린다면 모든 것의 몫을 부여한 치안의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셈해지지 않은 몫이다.)을 아감벤-슈미트의 인식과 대립시켰던 논리에 근거한다. 풀어쓰자면 누구도 그 질서에 감히 말을 더 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순간조차 질서의 밖에 있는 말들이 존재하며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증언을 보증하는 권위와 권위에 의존치 않는 말할 수 있음의 간극에 의해서 성립한다. 증언을 보증하는 권위란 곧 증언이 오직 권위의 보증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권위가 말에 앞서며 말은 곧 권위를 만들어내거나 지우지 못함을 의미한다.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대한 논의에서 법-질서를 중단시키는 예외상태의 선포는 오직 권위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즉 변화는 이미 자기 권한을 가진 자들의 선택일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법-질서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예외상태에 대한 논의를 아감벤이 (독재자로서)주권자의 결단을 강조하는 슈미트와 혁명적 순간으로 파악한 벤야민, 양측 모두를 언급했음에도 위베르만이 '아감벤-슈미트'로 독해한 것이다. 벤야민은 「이야기꾼」에서 모든 이들이 말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생을 살아갔음을 인정하는 죽음의 순간에는 삶의 경험을 전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벤야민의 인식에서 죽음은 증언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었고 체험했다는 근거로서 증언의 능력을 뒷받침한다. 위베르만이 반딧불이의 미광이라고 지칭한 '존속되는 말들'은 누구의 보증도 필요하지 않다. 곧 그 질서에서 권위를 가진 자들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에 도전하고 균열을 가할 가능성을 가진다. 이를 통해 법-질서가 창출되는 순간-예외상태는 벤야민의 인식처럼 혁명적 과정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이러한 위베르만의 도식은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에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다른 빛을 남기지 않는 권력의 서치라이트와 그에 속하지 않는 반딧불의 미광이란 대립은 셈해지는 것의 몫을 종합하는 치안의 질서와 충돌하는 몫없는 자들의 몫이란 랑시에르의 구분과 상당히 유사하다. 말할 수 있음에 대한 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증언을 가능케하는 권위를 중심에 놓는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에 대한 독해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르게 말하면 아우슈비츠라는 상징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적지 않게 아감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제노사이드 문제를 곡해할 가능성이 있다. 아감벤에게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의 존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조건으로 있을 뿐이다. 그는 아우슈비츠가 기억되는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불가능한 증언이 죽은자가 존재했다는 권위를 통해 가능해진다고 해도 증언이 공동의 기억으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참혹한 순간으로서 인식될 수 있었던 아우슈비츠의 고유한 조건에 의해(물론 이를 재의미화려는 다수의 노력들을 통해) 가능했던 일이다. 나치의 패전과 그 악의 고발이라는 조건 속에서 아우슈비츠는 공동의 기억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실상 나치가 행한 악이라는 기억의 형식이 먼저 형성된 뒤에 그 사건이 안착할 수 있었다.(그러나 분명 현재와 같은 이해를 획득하는데는 수 많은 연구자와 생존자, 공동체의 노력이 컸다.) 패전과 단죄라는 권위 속에서 증언이 가능했던 셈이다. 반면 대부분의 제노사이드들이 처한 상황은 이와 다르다. 그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사회에 그 사건들의 자리가 없는데 이는 곧 그 사회의 주권자가 행한 참극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겪었던 4.3항쟁과 보도연맹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의 기억들은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를 얻지 못했다.(오직 4월 혁명 직후의 열린 공간에서 잠시나마 의회권력의 도움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겪은 상황은 그 기억이 말해질 수 없다는 현실 뿐이었고, 말을 금지하는 권위의 틈세로 치열하게 말을 침투시키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학살이 끝나는 순간 이 사건이 말해질 수 있도록 공동의 기억이 열렸다면 대다수의 제노사이드 사건들은 끝나는 순간에 곧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밀려난다. 아감벤이 고민하는 증언의 순간은 실상 극회 예외적 조건에 해당하는 셈이다. 현기영과 같은 이들이 제노사이드 사건을 증언하는 과정은 닫혀진 공간을 비집고 균열을 가해온 고통스러운 길이었으며, 곧 증언이 불가능한 시대에 행해진 말, 어떤 다른 빛도 인정하지 않는 권력의 서치라이트로 가득 찬 시대에 잔존한 반딧불이였다. 그리고 끝내 남아서 빛을 발한 반딧불이들을 쥐고 있는 한국사회의 공동 기억(물론 아직 그 빛이 충분치 않다.)은 어떻게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지켜온 말이 그 조건 자체를 변화시켰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한국사회가 움켜쥔 기억들을 살피는 작업에서 중요한 참조점으로 이해되어온 아감벤(물론 그의 예외상태에 대한 논의는 제노사이드 발생의 조건을 설명하는데 탁월한 이론적 전범을 제공해왔다.)을 반성하고 그와는 다른 물음들을 조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게 위베르만의 질문은 흥미롭다.

"“우리는 이미 죽어 있다”고 확언하는 사울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감히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자, 죽음에서부터 말하는 자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