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로치의 영화 <자유로운 세계>의 가난한 싱글맘 앤지는 상사의 성추행으로 직장을 그만둔다. 이후 친구와 함께 인력 사무소를 설립해 노동 시장의 중개인이 된다. 이때 자유로운, 지극히 자유로운 자본주의 세계의 일원인 앤지는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인력을 중개하며 그들의 임금을 부당하게 가로채는 것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착취를 시작한다. 앤지는 순식간에 가난한 하류 계급 싱글맘에서 권력을 지닌 억압자로 변모한다. 그러나 이 억압은 착취 받던 남성 불법 이주노동자의 위협으로 붕괴된다. 불법 체류자인 남성은 가난하고 착취 당하지만 물리적인 힘이 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엔지를 협박하고 앤지의 아들을 유괴함으로써 ‘가난한 노동자’의 위치에서 순식간에 앤지의 목숨줄을 쥔 “남성 “이 된다. 그리고 착취자에서 육체적 힘이 부족한 여성으로 전락한 앤지는 살아남기 위해 착취자의 역할을 포기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언노운 걸>의 제니는 한 여성이 괴한한테 쫓기며 도움을 요청할 때 외면하는 실수를 했지만 행동으로 용서를 구하는 용감한 의사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려는 제니의 태도는 진실을 묻으려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반감은 응징으로 돌아온다. 제니를 응징하는 사람들은 대개 남자들이다. 의사 제니의 도움을 제일 필요로 하는 불법 체류 남성 노동자조차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제니를 향해 다짜고짜 손을 치켜든다. 영화 속 무수한 남성들이 제니를 향해 너무도 쉽게 물리적 위협을 가한다. 주목할 것은 폭력을 마주하는 제니의 표정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당당하려 노력하지만 겁에 질린 눈동자를 숨길 수는 없다. 프랑스 국적의 젊은 백인 의사라는 계급적 위치는 결코 제니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비겁한 앤지와 당당한 제니 사이에는 큰 공통점이 없다. 한 명은 돈을 쉽게 벌기 위해 부정의한 일을 하는 하류층 여성이고 한 명은 정의롭고 똑똑한 엘리트 여성이다. 단지 이들에게는 자신의 일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커다란 벽에 부딪힌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성의 폭력이다. 앤지의 경우 그녀가 착취한 불법 체류 ‘남성’ 노동자의 정당한 반란 정도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 노동자가 물리적 위협에 취약한 혼자 사는 싱글맘 여성이라는 앤지의 “여성성”을 이용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듯 자신들이 지닌 풍요로운 자원에도 불구하고 앤지와 제니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위협하는 남성성 앞에서 쉽게 패배한다.

두 여성의 물리적 패배는 모든 여성들의 부분적인 패배를 내포하고 있어 비극적이다.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욕망과 일치하는 삶의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나아갈 권리가 있다. 사무직 노동자가 될 수도 있고 축구 선수가 될 수도 있고 과학자가 될 수도 있다. 평범할 수도 있고 담대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남성의 물리적 위협 앞에서는 일률적으로 약자가 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유 재산의 등장이 여성 억압 즉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의 시작점이라고 했지만, 사유 재산이 없던 평화로운 원시 공동체에서조차 여성들은 다른 성의 물리적인 위협으로 인해 ‘일상적인 패배’에 직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물리력을 행사해서 우위를 점하는데 거리낌 없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성들이 현존하는 한 여성들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왜곡된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생물학적 결정론은 현실을 정당화할 뿐이며 현실과 평행성을 달리는 순진한 낙관적 전망은 차마 할 수 없다. 여성이 나약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나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문제라는 진실과 그럼에도 물리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의 교차 속에서 서있는 두 여성 앤지와 제니의 풍경은 이처럼 우리의 현실과 이어진다. 단지 겁을 먹은 눈빛을 보이면서도 자신에 대한 존엄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던 <언노운 걸>속 제니의 용기를 되새겨 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