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y Report
판타지 리포트
시작하겠습니다.
프롤로그
꽈르릉 꽝꽝~!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밤이었다. 비릿한 물냄새 속에 먹장구름은 낮게 머리를 스치듯 흘렀고, 눈앞을 때리는 빗줄기에 온 세상이 암흑천지였다. 바람까지 거세게 몰아쳐 숲은 우우웅~ 우는 소리를 냈다.
순간 시퍼런 섬광이 번쩍이며 하얀 악마가 대지를 내리쳤다.
쫘자자작! 꽈르르 꽈꽝~!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요란한 천둥소리가 함께 몰려왔다.
그 때 검은 옷을 입고 얼굴마저 복면으로 가린 날렵한 움직임의 그림자가 성벽 위에 나타났다.
쏟아지는 비를 다 맞으며 성벽 위를 순찰하는 병사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한 것과 거의 동시에 그 검은 사람은 담장을 타넘는 도둑고양이 마냥 재빨리 성벽을 넘어 다시 사라져버렸다.
성 깊은 곳, 하늘을 향해 뻗은 손가락을 닮은 여러개의 탑들 가운데 한 곳.
사내는 비에 축축히 젖은 복면을 슬쩍 그러내렸다.
번쩍!
창밖을 밝히는 번개를 닮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커다란 눈, 날카로운 콧날과 굵은 턱선이 아름다운 젊은 남자였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긴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 밤 복도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도의 끝엔 성의 주인인 듯한 귀족을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다.
사내는 그림의 아래쪽 벽돌을 밀어넣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꽉막혀있는 듯한 커다란 벽이 스르르 반바퀴 회전하며 뒤쪽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타났다.
뒤를 한 차례 돌아본 사내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 벽을 다시 회전시켰다.
귀족의 그림만 덩그러니 걸려있는 벽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선 순간 두 명의 보초병이 긴 복도 저쪽 끝에 등불을 들고 나타났다.
휘유~ 엄청나게 퍼붓는구만...이런 날씨에 바깥 성루 보초에 당첨된 친구들은 정말 좋겠어. 흐흐흐.
그러게 말이야. 킬킬. 우린 그동안 식당 가서 먹다남은 치즈라도 있는지 찾아보자구.
그러세나.
두 명의 보초가 막다른 복도 끝을 돌아 다시 저만치 사라져 갈 즈음 귀족의 그림이 다시 움직였다.
예의 그 검은복면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품에 오래된 검은색 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를 품고 있었다.
검은고양이 마냥 창문턱 위로 올라선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곤 그것을 텅빈 복도, 귀족의 그림 아래에 툭 던져 놓고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은 하얀 백합 한송이였다.
다음 날 아침
으아아악!
성주의 침실문이 활짝 열리며 잠옷바람의 젊은 영주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뛰어 나왔다.
모든 기사들을 불러라! 모든 영주들을 불러들여!
밤새 비를 맞으며 성을 지켰던 기사가 급히 달려왔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창밖엔 어느새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에 하얀 뭉개구름이 점점이 떠가고 있었다.
싱그러운 물줄기를 머금은 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새들이 내려앉아 기분좋게 노래하고 있었지만,
영주 알렉스 몬트 백작은 누군가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의아해 하는 기사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고 소근거렸다.
간 밤에 내 보고에 도둑이 들었다.
으헙? 부..불가능 합니다! 저와 제 부하들이 그..그렇게 철통같이 지켰는데...
기사의 눈 앞에 한송이 백합이 내밀어졌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걸 본 백작이 말했다.
산상노인이 다녀갔네. '그’라면 자네들로는 막을 수 없었던게 어쩌면 당연한 거였네.
'그렇다면 처벌은 면한겁니까?'
묻고 싶었지만 기사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주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가...무엇을 가져갔습니까?
곁에 있던 병사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백작은 그제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그 병사를 바라보고는 무언가 말하려고 손가락을 치켜들고는 입을 반쯤 벌렸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는 마음을 얼른 바꿔
기사와 영주들이 모이는 즉시 회의를 시작할 것이다. 무엇이 없어졌는지는 그 자리에서 밝히겠다. 숙직 기사는 병사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이 새나가면 모두 죄를 물어 처벌할 것이다.
아..알겠습니다.
기사와 병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둥근 테이블이 놓인 회의실에 헐래벌떡 달려온 기사와 영주들이 모두 모였다.
도합 열다섯 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의아해 하는 가운데 알렉스 몬트 백작이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 밀리는 소리와 갑옷 절그렁거리는 소리. 충성을 맹세하는 소리와 간밤의 일을 묻는 소리가 한꺼번에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백작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맹세의 돌]을 도둑 맞았다.
에?
맹세의 돌!
국왕과 각 지역을 다스리는 봉건 영주 사이의 '충성'의 다짐을 맹세한 문구를 고대어로 새긴 석판의 한 조각이었다.
그것은 사전적인 의미였고 실제의 맹세의 돌은 영주가 왕에게 받을 때만 보관함을 열어 그 실체를 확인하고 그 이후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이 돌엔 고대 위대한 마법사가 걸어놓은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그 마법은 바로...
맹세를 어길 경우 색이 변하게 되는 마법이다!
왕은 4년에 한 번씩 영주에게 하사한 맹세의 돌을 열어 그 색을 확인한다.
마법은 사라지고 왕이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악법 가운데 하나라는 설이 통설이다. 하지만, 누가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것인가?
마법이라니...터무니 없는 얘기지. 돌의 색이 변할리가 없잖아. 다만 왕과 영주 사이의 신뢰를 확인하는 의례적인 행사였다.
그 행사에 맹세의 돌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
누군가의 물음에 몬트 백작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맹세의 돌을 잃어버린 영주는...
꿀꺽!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주책없이 침 삼키는 소리를 낸 뚱뚱한 기사에게로 향했다.
되찾아와야 한다. 반드시 맹세의 돌을 되찾아 와야만 해!
백작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단호히 말했다.
'아, 그러니까 그 돌을 잃어버린 영주는 어떻게 되냐고?'
모두가 속으로는 묻고 있었지만 감히 말로 옮기지는 못했다.
자신들의 용감하고 젊고 잘생긴 영주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만 그 참담한 처벌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산중 노인에게 협상을 위한 사자는 보내셨습니까?
등받이 높은 흔들의자가 물었다.
알렉스 몬트 백작은 몇 일 사이 몰골이 말이 아닐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눈 밑엔 검은그림자가 드리웠고 볼은 헬쓱하니 들어가 있었으며 시선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자리에 서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손톱을 물어뜯던 그가 우뚝 뭠춰서더니 흔들의자를 바라보고 말했다.
보냈습니다. 보냈죠!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그겁니다. 산중노인에게 맹세의 돌을 돌려주는 댓가로 거액을 제시했지요.
결과는... 좋지 않았겠군요.
백작은 다시 흔들의자를 바라보았다.
의자에는 체구가 아주 작은 노인이 한 명 앉아있었는데 값 비싼 녹색 비단옷을 입고 융단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 성을 떠나 시골에 칩거하기를 선택한 노신 루커스 벨로텔리 경이었다.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이 다가 오고 있어요! 4년에 한 번 왕이 이 '몬트 영지’를 방문해 맹세의 돌이 담긴 상자를 열고 돌의 색을 확인하는 그 날이...
백작의 눈이 커다래졌고 몸을 떨었다.
두 달 남짓 남았나요?
유월 초닷새에 왕과 원로원 귀족들의 사냥이 시작되니 두 달도 안됩니다.
알렉스는 울 것 같았다.
참, 오다 보니 기사와 영주 몇이 안보이더군요. 혹...그들은 산중노인에게 보낸 것입니까?
벨로텔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용감한 저스틴과 바로스, 그리고 체니오 경이 병사들을 이끌고 산으로 쳐들어갔더랬습니다.
'바보같은!'
루커스는 터져나오던 욕설을 삼키고 가벼운 미소로 물었다.
몇 명이나 데려 갔습니까?
...아마도 백 명은 넘었을 겁니다. 음...2백은 안되었던 것 같군요.
몬트 백작은 거의 체념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산중노인의 '해시시안' 조직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정예 기사 이백 명이 몰살 당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벨로텔리의 말에 알렉스는 머리를 어깨 사이로 말아넣을 것만 같이 하고는 커다란 눈을 디룩디룩 굴렸다.
그 잘생긴 미남 백작이 처절한 몰골로 울먹였다.
모두 죽었을까요?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도 들려오질 않으니...
산중 노인은 얻는 것 없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쉽게 풀어주지도 않죠. 맹세의 돌에 기사와 병사 몸값 150명분을 더 얹어야 할 것 같군요.
몬트 백작은 말 없이 자신의 오래된 가신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그 해결책을 말해주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벨로텔리는 길게 자란 자신의 수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백작이 들을까 말까한 소리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몬트家에는...
지난 날 몬트 백작은 그가 '우리'라는 표현을 썼을 때 매우 불쾌해 하더니 어느 날 시골로 내쳤었다.
모두가 영지의 꾀주머니인 벨로텔리를 멀리하지 말기를 청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제 막 새 영주가 된 젊은 몬트는 가차없이 지난 날의 기억과도 같은 노신을 내쳤던 것이다.
이번에는 벨로텔리가 무슨말을 하는지 온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만 있었다.
우리 몬트가에는... 보물이 맹세의 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른 보물도 있지만 맹세의 돌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맹세의 돌을 능가하는 보물이 있지요.
....?
알렉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이내 다시 가는 실눈으로 변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있잖습니까? 모두가 에 대륙의 보물이라고 칭송하는. . .
말을 마친 벨로텔리가 천천히 몬트의 앞으로 걸어갔다. 당당한 체구를 가진 몬트에 비하면 어린아이만한 작은 벨로텔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몬트 백작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엘리스와 크리스티나가 그들이었는데 그중에서 크리스티나 몬트는 저 옛날 '다이아나 몬트’(여신 다이아몬드로 불렸었다.)의 뒤를 이어 몬트 가문에 태어난 또 한 명의 여신이었다.
그녀에게는 '에-대륙의 보물'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에-대륙의 보물..?
그렇습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태어 나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벨로텔리의 물음에 몬트 백작의 얼굴이 회상에 젖은 듯 몽롱하게 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줄을 섰었지요. 오랫동안 딸이 태어나지 않던 우리 몬트 가문에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딸이태어났으니까요. 다이아 몬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먼저 청혼 하겠다고 처들어 오는 바람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었죠.허허...
맞습니다. 그 때 모여든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혀 각하께서 그들을 내쫓으며 하나의 령을 내리셨지요.
'영애께서 16세가 되시는 날까지 그 누구의 그 어떤 청혼도 구혼도 받지 않겠다’고!
몬트의 눈이 천천히 크게 떠지고 있었다. 눈밑의 그림자가 작아지고 어깨 사이로 파고들었던 목도 점점 솟아 올랐다.
영애께서는 이제 드디어 16세가 되실 겁니다. 바로 한 달 뒤에 말이죠.
"...?"
기사대회를 여십시요.
기사대회?
네,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남편을 구하는 기사대회!
"...?"
뭇 사람들이 몬트가의 사위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미모와 지혜를 사랑합니다. 또한 아가씨는 한 나라의 여왕으로도 손색이 없으시죠.
그렇다고 딸을 이용해 뭔가를 한다는게...
공주를 두고 수많은 기사들이 용기를 겨루는 기사대회는 고래에 수없이 많이 열렸고 이야기의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모두가 최고의 미인을 배출해 내는 몬트가의 사위가 되고 싶어하는 때에 '기사대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또한 각하께서 지난 날 공표하신 '령’을 지키시는 일이기도 하지요.
기사대회를 열면?
기사대회에 참가한 용사들에게 산중노인의 악행을 알리시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시는 겁니다. 뛰어난 기사들에게 도둑맞은 보물을 되찾아 오면 바로 아가씨와 결혼 할 수 있다는 비밀 미션을 내리셔도 좋을 겁니다.
이제 백작은 얼굴이 환해지고 가슴과 허리를 당당히 펴고 그 잘생긴 얼굴을 거의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혹 모르죠...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올린 왕자님이 참석하실지도요...
오오! 보입니다. 내가...아니, 이 몬트 령이 살아날 빛이 보여요! 벨로텔리 경, 내 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주실 것을 간곡히 청하는 바이오. 친구여!
백작이 허리를 깊이 꺽어 말했고 노 신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