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여린 이름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여덟 살 때 나의 아버지는 다른 아이들 아버지처럼 무었이나 할 수 있는 수퍼맨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열살 때의 아버지는 언제나 놀아주며 맛난 것을 사주시던 다정한 아버지도 아니었고, 열 다섯이 넘어서는 후한 용돈을 주던 그런 너그러운 아버지도, 그 후 내 장래를 걱정 하며 머리를 맛대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그런 속 깊은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기억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늦은 밤 술 취한 모습으로 들어 오셔서 횡설수설 하며 나를 화나게 했던 아버지였으며, 어머니와 하루가 멀다고 하는 잦은 다툼으로 내 작은 가슴을 졸이게 하던 그런 아버지 였습니다.

내 나이 이십대 중반에 치열한 삶을 사시던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그 후 몇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생활의 불편함을 호소하시며 재혼을 하셨고, 어머니께서 내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살게 하라던 강변가의 강남 아파트를 빼앗아 나를 변두리 월세 아파트로 내몰고 매달 말이면 월세 걱정에 전전 긍긍하던 나를 외면 하던 그렇게 얄밉고 매몰찬 아버지 이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충분히 얄밉고,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막내 아들로 살아 왔습니다.

이제 내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 하고 나서야, 내가 아버지로서 수십 년의 세월을 흘려 보내고 나서야, 술에 휘청거리던 아버지의 발걸음 뒤에, 하루가 멀다고 다투던 어머님과의 싸움 뒤에, 돈 한푼에 벌벌 떠시며 곰탕 한그릇을 사서 나누어 주시던 그 손 뒤에, 기를 쓰고 재혼을 하려 하시던 고집 속에 그늘졌던 그 애잔한 마음들이 어렴풋이나마 읽어 집니다.

나는 어려서 어른들은 다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처럼 나이가 먹으면 감정도, 슬픔도, 사랑도, 욕심도 없어지는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되면 먹고 잘 곳이 그냥 생겨 아무 걱정 없이 가족들과 살게 되고, 죽음도 다 초월해 버려 두려워 하지 않으며 사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나이를 먹고 나서야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세글자, 아버지입니다. 아직도 마음은 10대와 같아 무서운 것은 무섭고, 아픈것은 아픈데, 아직도 어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어른인 척하며 씩씩한 모습으로 길을 만들어야 하는 아버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이, 무서워도 술 한잔 걸치고 또 앞으로만 달려야 하는 아버지, 길고 긴 빈자리로 가족들이 남처럼 어색해져 외톨이가 된 아버지, 그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외로운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몇 해 전 아버지가 혼자 지내던 시니어홈에서 잠시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잔뜩 취해 저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셨고 그런 모습에 화가나 폭발한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몇일인가 집을 나가 있었습니다.

몇일 만에 들아와 보니 아버지는 혼자 또 술을 들고 계셨고 난 아무말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바깥이 조용해져 나와 보니 아버지는 쪼그리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잠든 아버지의 모습 어찌나 작고 초라해 보이는지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몇 올 남지 않은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 주름지고 뼈만 앙상히 남아 있는 다리, 안주로 드시다 남은 된장과 고추 몇 개, 찡그리고 주무시는 야위고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토록 여린 아버지와 싸운 내 자신을 욕하고 또 욕하였습니다.

물 한잔 먹으려고 연 냉장고 안에는 계란이 줄줄이 쌓여 있었습니다. 매일 구내 식당에서 아침 식사때 하나씩 주는 것인데 나에게 미안 했는지 안드시고 주려고 가져 오셨나 봅니다. 요구르트 하나씩 주는것 저번에 나도 먹어 보자고 하나 더 가져 오시라 했더니 남사 스럽다 손사레 치시더니만 그 요구르트 여섯 병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보고 나를 그날밤 엉엉 소리내어 한참 울었습니다.

이제 90세가 되는 아버지에게, 아직 내가 사랑한다는 말, 미안 하다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을 때, 아버지께 진심으로 미안 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오늘밤 아버지께 전화 드려 말씀을 드려야 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아무말 없이 오래 오래 동안 안아 드리고 소주 한잔 같이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들의 훈장.. 얼굴의 주름과 그 여윈 팔다리들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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