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여름방학 시작은

선 sun
4 min readAug 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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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의 연속 ]

호우주의보가 예고되었던 날의 그림같았던 파란하늘

맑은 파란하늘을 담은 사진을 남기고 싶어 잡아두었던 촬영날에는 호우가 내려 촬영이 취소되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서 뛰어 노는 사진을 찍으려했던 날엔 그 어느때보다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게다가 영화촬영때문에 방학일정을 잡았는데 영화촬영이 미뤄졌다. 또 짧은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지만 방학의 시작이었던 주말에 많은 비가 내렸고 방학 내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계속되었다. 결국 여행을 취소하고 거의 방학내내 집에 있었다. 그리고 끌려가듯이 다녀온 장학생 워크샵에서 뜻하지 않은 에너지를 많이 얻고 돌아왔다.

[ 나를 챙기기 ]

호우주의보가 발령되었던 일요일, 비에 옷이 젖는게 너무 싫어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빗소리를 듣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제일 중요했던건 우울해지지 않기. 전생에 해바라기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햇빛을 좋아하고 비오는걸 싫어해서 오래도록 비가내리는 장마철이면 축축쳐지기도 하고, 여행도 취소된 상태라 끝도없이 떨어질 감정을 잡아두는게 필요했다. 게다가 일요일엔 룸메이트가 바깥일정이 있어 혼자 하루종일 집에 있어야했다. 그렇게 여러 방안들을 생각해보다 ‘요리’가 떠올랐다.

자취생이라 재료를 사두면 상하는 경우가 많아 냉장고에 식재료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챙기거나 밖에서 사먹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생활을 계속해오던터라 요리는 특별한 이벤트에 가깝다.

그동안 먹고싶었으나 비싸서 못사먹었던 요리나, 밖에서 혼자 사먹기 힘든 요리들을 쭉 적어보았다. 이것저것 적어보다 부추전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항상 비가오면 전이 먹고 싶어지는데 친구를 불러서 먹으러가도 부추전은 잘 없고, 해물파전이나 감자전만 파는 경우가 많아 부추전을 안먹은지 거의 2년이 다 되었었다. 그리고 SNS에서 한창 유행했던 계란카레. 다들 음식사진을 어찌나 맛있게 찍던지 SNS에서 발견할때마다 침을 삼키곤 했던, 계란카레와 부추전을 메뉴로 정했다.

하지만 요리는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토요일에 장을 보러갔는데, 부추를 아주아주 크게 묶인 단으로만 사야했다. 게다가 부추가 엄청 무럭무럭 자란 부추여서 길이도 엄청났다. 양파도 하나만 사고싶었는데 두개가 묶인게 최소였고, 애호박도 남을게 뻔했지만 하나를 사와야했다. 그렇게 텅텅비었던 냉장고에 채소가 가득 채워졌다.

다음날 빗소리를 들으며 느즈막히 눈을 떴다. 알람을 안맞추고 잔게 얼마만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알람없이 눈이 떠질때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가 행복했다. 다들 바빠 어질러져있던 주방을 깔끔히 정리하고, 계란 카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리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일단 카레봉지 뒷면에 적혀있던 1인분의 물양은 잘 맞추었는데, 가루의 양을 계량할 수가 없었다. 이정도면 되었겠지하고 넣었더니 너무 물같은 카레가 되었고, 그래서 가루를 더 넣었더니 너무 찐득한 카레가 되었다. 그렇게 물을 넣고, 가루를 넣기를 반복하다 거의 3인분이 넘는 카레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끝에 점심을 해결했다.

요리는 나름 예쁘게 담아냈지만 냄비에 한가득 남은 계란카레..

분명 요리 시작할땐 기분이 좋았는데 요리가 생각대로 안되니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었다. 그대로 거실에 조용히 앉았다. 평소같으면 다운된 기분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고 무엇이든 했었을 것이다. 한껏 꾸미고 나간다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던가, 재미있는 콘텐츠를 찾아본다던지 뭐 그런것들 말이다. 그런데 그냥 그 감정을 그대로 두고싶었다. 정말 조용히 다운된 기분으로 한시간정도를 앉아있었던 것 같다. 들리는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 뿐이었다. 그렇게 앉아있다 문득, 내가 왜 기분이 안좋아졌는지를 생각했다. 요리가 생각대로 안되기 때문이었고, 요리를 하려했던 이유와 요리를 시작할때의 마음을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부추를 썰고, 애호박을 썰고, 양파를 썰었다. 애호박은 채썰기를 했어야했는데, 깍둑썰기를 해버렸지만 괜찮았다. 밀가루와 물도 재료에 비해 많이 넣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맛있게 먹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나를 챙기려고 요리를 시작한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추전이 완성될즈음 룸메들이 하나둘 돌아왔고, 룸메들과 함께 부추전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완벽하지 않아서 더 의미있었던 하루. 즐거운 방학의 시작이었다.

덧붙임. 그렇게 대용량의 부추를 사온 이후로 방학 내내 엄청난 종류의 부추요리를 해먹었다. 부추는 어떻게 요리하던 맛있는 채소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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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sun

선할 선. 그리고 햇빛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