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산다는 것



  1. 대형서점에서 나는 일상에서 늘 겪는 고질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막연히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서점에 들어와 여러 서가를 기웃대지만 내가 어떤 책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책은 너무 비쌌고 어떤 책은 너무 무거웠다. <자존감>이라는 제목의 책 앞에서 미간을 찌푸렸다가 <21세기 자본론> 앞에서 호기심에 멈춰섰지만 너무 크고 무거운 탓에 들었다 놨다 한참을 고민했다. 읽을 땐 재밌고 읽고 난 뒤엔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는 책을 사고 싶었지만 이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서 어떤 책이 그런 책인지, 시간을 투자해 일일히 읽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어떤 것들에 먼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결정하기 힘들었다. 하루에 길어야 두 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서점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마치고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2.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은 확실히 있었지만, 싫어하지 않는 것이 모두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서검색대에서 구룡성채라는 단어를 이리저리 바꿔 검색해 보다가 원하는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다시 천천히 서가 사이를 걸었다. 나는 계속해서 너무 많은 선택지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대형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경험은 서울에서의 생활과도 같았다. 커다란 도시에서는 무엇이든 소비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고를 자유는 없다. 대도시에서 나는 자본에 매몰되지 않은 나만의 확고한 취향이 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나와 비슷한 소비 양상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그것도 매우 자주) 이것이 정말 ‘나의 취향’인가 하는 의구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들로 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본주의’ ‘대도시’ 속에서 교육받고 접한 것들이 무의식의 영역까지 조종하는 것은 아닌가? 때로는 우리가 도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우리를 소비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3. <플로팅 시티>라는 책을 보면 뉴욕의 지하 경제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나온다. 마약 밀매상, 매춘부, 포주 등인데 재밌는 점은 주로 이민자로 구성된 빈민 계층만이 그런 지하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동부에서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백인 프레피들도 거기에 상당수 끼어있다.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서 상당한 수직적 간극이 있는 이 두 계층은 비슷한 활동을 하지만 그 활동의 동기, 상호작용하는 대상 모두 지극히 다르다. 한국식으로는 ‘상경’한 셈인 빈민 이민자들은 고향보다 물가가 훨씬 비싼 뉴욕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송금하거나, 가족들을 뉴욕에 불러온다. 아주 운이 좋으면 사업이 잘 풀려서 가족들과 뉴욕의 서민 계층에 편입해 평범한 시민이 되어(그들의 직업은 평범하지 않지만) 살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운이 나쁘다. 그들의 일, 그들이 상대하는 고객들 모두 위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하루 신체의 안전을 담보로 내놓고 일하는 셈이다. 또한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일 또한 녹록치 않다. 결국 그들은 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반면 백인 프레피들이 불법 행위로 사업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거대한 현금을 모으기 위해서다. 표면적으로는 부자인 부모님, 남편 등의 재력에 기대어 살며 한편으로는 온전히 자신의 것인 현금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마음껏 소비하기 위해 지하 경제에서 활동한다.
  4.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특히 도시에서는 더욱 무엇을 얼만큼 소유하고 있는지가 삶의 대부분의 영역을 결정하는 것이다. 삶의 영역들이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징표는 소비다. 앞서 말한 뉴욕의 백인 프레피들이 마약을 매매하고 매춘부와 접선하는 장소는 오페라 극장, 소호의 갤러리, 드레스 코드를 맞춰야 하는 고급 레스토랑과 바 등지다.
  5. 예시를 지하 경제로 들었지만, 사실은 우리의 일상 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소비는 우리의 모습을 결정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깝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씬(scene)을 연출하는 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진심을 다 해 소비한다.
  6. “그들은 시간의 여유를 갖고 싶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지만, 그들에게 무엇 하나 가져다주지 않는 세월은 마냥 흐르기만 했다. 결국, 다른 이들이 삶의 단 하나의 성취로 부를 꼽게 되었을 때, 그들은 돈 한 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들은 별 볼 일 없었다.” — 조르주 페렉, <사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