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오롯한 나의 선택을 위하여.

우리는 살면서 왜 이렇게 많은 선택을 해야할까. 
그리고 나는 그 많은 선택들을 도대체 어떻게, 왜 하는 것일까.

심지어 이 글의 첫 문장으로 뭘 쓸지도 선택을 해야 했다. 머릿 속에 떠오른 수 없이 많은 진부한 문장들과 말도 안 되는 문장들, 이상한 문장들과 제대로 된 문장들 사이에서 내가 선택한 문장이 바로 보는 바와 같은 첫 문장이다. 난 왜 저 문장을 이 글의 첫 문장으로 쓰기로 했을까.

나는 내 첫 직장을, 주위의 동기들이 많이들 택했던 길-회계사나 대기업, 금융권-이 아닌, 이제 막 분사를 결정한 스타트업으로 선택했다. 당시에 회사는 전체 팀원이 날 포함해도 10명이 채 안되는 아주 작은 회사였다. 물론 지금도 그리 큰 건 아니지만. 나는 왜 이 회사에 계속 다니기로 결정했을까.

나는 먹고 마시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것들을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요리와 음료를 만드는 일들은 또한 선택의 연속이다. 재료는 어떤 방식으로, 크기로 썰까, 조미료는 얼마나 넣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조리를 할까. 수 없이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의 지침이다.

‘기호에 맞게.’

그렇게 만들어진 접시 위, 컵 안 속의 결과물은 남들에게 정당화할 필요 없는, 내 선택의 결과물들로서 오롯하다. 누군가 내게 와서 이걸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하나뿐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이영도의 소설 중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인용해본다.

“하지만 교수는 인간이고 오크나 인간은 그렇게 이성적인 동물이 아냐. 입이 찢어져도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고 말 못하는 종족을 열거해 보면 인간은 꼭 들어갈걸.”
“내가 그러고 싶어서? 무슨 말입니까?”
“그게 정의여서, 그게 당연한 이치거나 관습이어서, 혹은 그게 사람 사는 도리여서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고는 말 못한다는 거야. 자기를 작게 보는 종족이거든. 그래서 오크나 인간은 신념이나 자기 주장이라는 말에 경외감을 품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불의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라. ‘그게 정의니까!’ 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기는 하겠지만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라고는 말 못한다. 그것은 무례한 자나 범죄자의 화법이라고 생각한다.
- 이영도, ‘오버 더 호라이즌’

매트릭스 3 마지막 전투씬에서, 지쳐 쓰러진 네오에게 스미스요원은 다가가 묻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희망 없는 싸움을 계속하냐고. 왜 포기하지 않느냐고. 그러자 네오가 대답한 말이 생각난다. 네오는 자신의 매트릭스를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이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네오는 이렇게 말했다.

“Because I choose to”

나는 내가 앞으로도 내 삶의 보다 많은 부분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내 선택을 남들에게 정당화할 부담을 느끼지 않기를, 그리고 그 결과들이 내 선택의 집합으로서 오롯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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