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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그녀의 이야기

애주가의 길
나는 애주가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애주가처럼 매일 술을 즐겨 마시거나 좋아하는 술이 확고하거나 다양한 酒 종류만큼 다양한 음주 방법을 알고 있진 않다. 나는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장소의 분위기와 상대, 그리고 알코올이 내 몸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 같은 사람도 애주라가 볼 수 있지 않을까.
20대 초반에는 술이 달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술자리를 즐겨하지 않았었다. 온통 쓴맛만 나는 물이 뭐가 좋다는 건지. 술을 마시는 것보다 카페에 가서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이 훨씬 좋았다. 술 취한 뒤에 의미 없이 뱉는 말보다 멀쩡한 정신일 때 하는 말들이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그러다 짝사랑만 하던 오빠가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속은 너무 아팠지만 겉으로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것이 더 쓰리고 힘들었다. 쓰린 마음을 어떻게든 잊고 싶어 소주를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평소엔 입에도 대기 싫었던 소주가 그땐 왜 그렇게 달았는지. 결국 그 다음날 탈이 났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었다. 사람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더라.
이때가 술을 좋아하게 된 계기라기 보단 술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 사라진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술이라는 건 늘 우리 주변에 있어 조금은 쓸쓸하거나 힘들 때 가장 쉽게 위로를 해주는 존재이자 기쁨은 배가 되게 하는 존재이지 않나. 그리고 낯선 이와 조금은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술이 이런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과하게 마실 경우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범죄를 유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도 장단점이 있듯 모든 물건에도 쓸모에 따라 의미를 가지니 뭐든 적당히 즐기기만 한다면 해로울 건 없다고 본다.
스물아홉, 지금 내 나이가 좋은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 상관없이 내 주량만큼 자제하며 술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20대 중반까지 나는 내 주량을 잘 알지 못했다. 괜히 너무 취할까 한 잔 두 잔만 마시기도 했었고, 기분이 좋아 평소보다 많이 마신 날엔 흔히 말하는 고주망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점차 자연스럽게 내 주량을 알게 된다. 나는 소주는 다섯 잔, 맥주는 500cc 세 잔 정도 마시면 딱 기분이 좋다. 막걸리는 제일 좋아하는 주류라 혼자서 한 병도 거뜬하고, 와인은 세 잔에서 네 잔이 적당하다.
내가 술을 즐기는 방법은 많지 않지만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 맥주 한 캔을 사고, 집에 돌아와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다운받아 빔 프로젝터에 연결해 맥주와 함께 즐기는 방법이다. 거기에 간단한 안주가 곁들여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자주 즐기는 방법은 아니지만 휴식이 필요한 날엔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없다. 나름 나만의 취미를 진득하게 즐기고 싶어 냉장고 한 칸을 아예 맥주를 위한 칸으로 비워두기도 했다. 그 공간이 맥주로 꽉 차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냉장고 중 저 한 칸이 내 의지로 만든 온전한 공간 같아서 그런지. 조금 더 농익은 취미가 되면 술을 위한 냉장고를 사서 주류를 종류 별로 쟁여놓고 싶다. 그 날 그 날 기분에 따라 하루는 맥주를 마시고, 그 다음 날은 와인을 마시며 힘들었던 일을 안주 삼아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꿈. 비록 지금은 냉장고 한 칸에 더부살이 하는 취미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제 집을 마련해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낼 수 있지 않을까.
평상시에는 이렇게 내 멋대로 술을 즐길 수 있지만 딱 한 곳, 이 곳에서 만큼은 술 마시는 것이 참 어렵다. 바로 회식 자리. 술을 마시기도 안 마시기도 애매한 불편한 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어색한 분위기에 휩쓸려 타의에 의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 20대 중반,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에게 회식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거머리 같은 존재였다. 조금 일찍 집에라도 가려고 하면 ‘막차가 끊겨서요.’, ‘부모님이 올라오셔서요.’ 등 남들과 겹치지 않는 별별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핑계도 잠시 뿐, 장기적이지 못하다는 부분에서 가장 좋은 핑계라고 볼 순 없다. 그렇다면 어떤 말이 가장 강력할까. 바로 ‘저는 술을 잘 하지 못합니다.’ 라는 말이다. 쉽게 술을 권하지 못하도록 애초에 싹을 자르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회식 자리에만 가면 술 맛이 뚝 떨어지니.
애주가도 장소와 사람은 가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