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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그녀의 이야기

여행의 묘미

나에게 있어 여행은 어릴 때부터 매우 친숙한 놀이었다. 매년 여름 휴가철이 되면 부모님을 따라 산과 바다, 전국 방방곳곳을 다니곤 했는데,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학업에 매진하기 위해 3년 내내 여행과 담을 쌓았었다. 그러나 늘 마음속에서 유리창 밖의 다른 풍광을 바라보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여행에 갈증이 있을 때 쯤, 쌍둥이 언니와 난 둘이서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여행을 하기로 한다. 장장 10일 동안 어른 없는 여행을 한다는 사실에 겁부터 났지만 떠나기 며칠 전부터 잠을 설칠 만큼 기대됐던 게 사실이었다. 여행 시작 전부터 마치 큰일을 해낸 것 같이 의기양양했으니. 마음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퍽 좋았다. 첫 여행지는 강릉으로 선택했다. 강릉에서 아래로 쭉 내려오는 일정을 짜면서 나름 이동 거리와 경비를 줄일 수 있는 계획이라며 스스로 대견해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긴 거리를 계속 걸었고, 경비를 아끼기 위해 끼니는 분식으로 때우기가 다반사였으며, 동행이었던 언니와 서로 감정싸움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0일이라는 짧은 여정이 나에게 큰 의미를 주는 건 우리나라의 몰랐던 풍경을 내 몸 속 구석구석에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생각나는 풍경 중 하나가 바로 안동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에 가면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언덕이 있다. 그곳에 올라 찬찬히 아래를 살펴보니 하회마을의 참 의미를 알 수 있겠더라. 하회마을은 한자로 河回(물 하, 돌아올 회)라고 쓰는데, 말 그대로 물을 휘감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즉, 강이 마을을 휘 돌아간다고 하여 하회라는 지명을 가지게 된 것인데, 그래서인지 나는 하회마을을 떠올리면 종가집, 토담집이 아닌 마을을 감싸고 있는 물줄기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밖에도 하얗게 얼어버린 동강이 깨질까 조마조마하며 강을 건넜던 기억, 걷다 우연히 발견한 사진 전시회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기를 구경했던 기억, 1시간 넘게 걷고 또 걷고 나서야 고씨동굴에 도착했던 기억 등 많은 기억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내 몸 어딘가에 녹아 20대 초반의 나로 기록되어 있다. 가끔 그 때 맡았던 비슷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힐 때면 그 때의 어린 나의 모습과 그 풍경을 담으려했던 초롱초롱한 내 눈빛이 여전히 생각난다.

그 이후 나의 여행은 기존의 여행과 다른 풍경으로 바뀐다. 스물 둘, 교환학생으로 선발되면서 꿈의 나라인 미국에 1년 동안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낯선 풍경에서의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매일 매일이 여행인 것 같은 기분. 1년만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그래서 방학이나 추수감사절과 같이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 곳곳을 여행하곤 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여행은 마치 일탈과 같았다. 나를 알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이라니. 낯선 곳에서 더 낯선 공간을 찾아 헤맬 때 느끼는 긴장감이 좋았고, 하루, 이틀이 지나 금세 익숙한 곳이 되는 것도 좋았다. 걸으면서 눈에 담기는 풍경과 코로 느껴지는 냄새, 귀로 들리는 낯선 언어가 호기심 많은 나를 더 부채질 하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내 체취와 발자국을 남기고 기억에 또렷이 새겨두었다.(이때의 여행은 여행자의 집 두 번째 이야기 <문득, 여행처럼>에 자세히 담겨있다.) 그 때 난 참 행복했었다. 비록 부모님이 보내주신 돈을 아끼고 아끼며 호스텔, 값싼 햄버거만 먹으며 전전긍긍 했던 여행이었지만 낯선 문화를 경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게 완벽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 때의 잔상은 꽤 오래갔다. 취업준비생이라는 명찰을 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을 무렵, 그 때의 추억은 나에게 심심한 위로가 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여행을 가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눈치 보느라 길게 휴가를 내지도 못할뿐더러 잠깐 미친 척하고 휴가를 3일 이라도 내는 날엔 갑작스런 일처리에 제대로 휴가다운 휴가는 보내지 못하기 일쑤였다. 스물일곱이 되던 해, 결국 일에 지쳐 사표를 쓰고 나서야 비로소 여행다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떠난 여행은 기존 여행과는 사뭇 달랐다. 가장 먼저 내 나이가 달라졌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180도 달라져 버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싱그러운 나이가 아니었고, 누군가가 샘내하는 나이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내 나이가 나조차도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부모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되면서 내가 짊어져야하는 내 삶의 무게가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점점 무거워짐을 느껴야했다. 그러던 중 떠난 여행은 마치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아무생각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면 꼭 맘에 드는 카페가 하나는 나온다. 그럴 때면 고민 없이 카페에 들어가 밖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생각나는 것들을 끄적거리는 재미가 얼마나 크던지. 그 순간만큼은 내게 주어진 시간을 펑펑 낭비할 수 있었다. 시간을 쪼개 쓰던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하루가 여행의 매일이었고, 나도 몰랐던 내 삶의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여행은 크게 특별한 순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낯선 공간이 여행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를 여행으로 느낄 수도 있다. 어떤 형태의 여행이든 내가 그 순간을 즐기면서 행복했다면 그 자체로도 이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