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하는 시간

완벽하고 싶다는 욕망,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평균값은 하자는 조급함, 실수는 절대로 안된다는 부담감, 나에 대한 체념, 사람들의 실망, 그들과 나 사이에 쌓인 심리적 장벽.

모든 생각의 고리와 심적 변화가 돌고 돌아 나를 가리킨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성취가 좌절됐을 때 낮아진 자존감, 차갑게 식어버린 사람들의 온도, 모든책임의 소재는 나라고 말한다.

나는 무채색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채색인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덕지덕지 물감이 칠해진 신발을 신고 캔버스 위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문득 걸음을 멈추니 지나 온 흔적이 보였다. 색도, 길도, 길의 선형도 온통 뒤죽박죽이다. 목적지도 없다. 누구는 목적지가 없어도 잘만 걷던데. 알 수 없는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머리 아파 생각을 덮어 놓고 지냈더니, 기어이 문제가 터졌다.

즉각적인 고통이 따를 때에는 잠시 아픈 대로 내버려두면 금방 회복됐는데. 이번 생채기는 오래 갔다.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정신 없이 돌아다니다 가만히 멈춰 서서 내 몸을 돌아보니 여기저기 터지고 곪은 상처가 보였다. 대처하지 않고 미뤄서일까. 상처가 내 몸보다 커져버렸다.

직장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빠르게 커가는 회사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늘 허덕였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 틈에서 나는 하루가 다르게 감정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감정의 문제를 감정으로 해결하려 했다. 기분이 좋아지면 불안감이 사라질 것이고, 부담감도 줄 것이라고 믿었다. 더 나은 감정 상태를 기대한 만큼, 기대가 굴복될 때마다 반대편에 있는 감정에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이동하다, 그러다 완전히 바닥에 쿵 닿아버렸다.

바닥에 닿자 이상하게도 겁이 사라졌다. 마음이 담담해졌다. 천천히 감정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됐다. 전제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꿨다. 빠르게 커가는 회사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늘 허덕였는데, 매일 주어진 시간을 감정에만 허비하고 있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데.

이제는 ‘힘들다’고 느끼지 않는다. 가끔 버거우나, 그때마다 끝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생각한다. 우선 이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판단하고, 그 방향이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돌아서리라 다짐한다. 목적지는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마음에 맺힌 응어리 때문에 캔버스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나름의 인생 계획이, 삶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룰이 생겼다.

그래도 힘들 때에는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면서 면도를 한다. 깊게 생각하거나 감정을 파헤치지 않고, 살갗의 털을 정리하며 머리 속을 정리한다. 삐죽빼죽한 잔털 없이 매끄러워진 피부에 로션을 바르면, 내가 소중해지는 것 같다. 나에게 집중한다. 이제 나에게도 꽤 단단한 지지대가 생긴 것 같다. 외형적으로 달라진 건 없지만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감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조금 더 평정하게 희망을 내 안에 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