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1

잠을 한 숨도 못잤다. 어제 밤에 갑자기 시작된 설사 때문이었다. 한참 잘 자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일어났는데, 그 이후로 거의 30분 마다 신호가 와서 제대로 누워 있지를 못했다. 잠도 못 자고 계속해서 설사를 해댔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화장실을 왔다갔다 하다가 녹초가 되어 겨우 잠이 들었고, 오늘 11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처음에는 물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호주에 도착한 첫 날 부터 여태 물을 끊임없이 마셔재꼈는데 4일차가 되어서야 물갈이가 시작된다는게 이상했다. 내 몸이 익숙하지 않은 박테리아나 미생물이 들어갔으면 첫 날 부터 물갈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어제 마신 우유가 의심스러웠다. 어제 저녁으로 뭘 먹을까 하다가 우유에 씨리얼을 말아먹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게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마신 우유였다. 아무래도 매일 마시던 물 보다는 어제 처음으로 마신 그 우유가 배탈의 원인일 것 같았다. 그래서 저 우유는 이제 마시지 말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12시쯤 되니까 속이 좀 괜찮아지면서 배가 고파왔다. 그리고 배가 고파지니까 미련하게도, 반 넘게 남아있는 우유와 씨리얼이 아까워 보였다. 내일 모텔을 나간 뒤로도 저걸 들고 다닐 생각은 없었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버리거나 먹거나였다. 처음에는 안 먹으려고 열심히 버텼는데, 결국 배고픔에 굴복하고 씨리얼을 말아먹었다. 씨리얼을 다 먹고 나니까 그제야 겁이 났다. 그래서 잠시 기다렸다. 혹시나 배탈이 난다면 버스나 길바닥이 아닌 모텔에서 처리하고 싶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이것저것 하면서 기다렸는데 배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모텔을 나섰다.

버스는 금방 왔다. 그리고 어제 호주에서 버스 타는 방법을 검색해 보았기에, 당황하지 않고 잘 탈 수 있었다. 여기서는 버스를 탈 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그 목적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요금을 낸다. 교통카드가 있으면 그냥 탈 때와 내릴 때 간편하게 카드만 찍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거 없으므로 현금을 내기 위해 목적지를 이야기 하고 타야했다.

브로드비치 역으로 갈거야.

브로드비치? 어디보자… 8.5달러!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지만, 요금이 8.5달러나 한다는 사실에 조금 놀랬다. 호주는 우리나라보다 인건비가 높으니까 그럴만 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요금은 둘째 치고, 정작 당황스러웠던 것은 버스에 안내방송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한참 타고 가다보니 문득, 안내 방송이 하나도 나오지를 않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벨을 누르고 내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맨날 타는 사람들은 풍경만 봐도 어딘지 알겠지만, 나 같은 외지인은 알 길이 없는데 어떡하란 걸까 싶었다. 다행히 구글 맵에서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건지 원 .

골드코스트 시내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버스는 안전운행 하느라 속도를 빠르게 내지 않았고, 40분 정도가 지나서야 도시의 풍경이 나타났다. 버스는 시내에서도 한참을 달리다가 ‘브로드비치 사우스 스테이션’ 역에서 멈추었다. 그 역은 트램 역이었는데, 거기서 나만 빼고 모두 내렸다. 나는 어제 확인한 브로드비치 역까지 가야된다는 생각에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기사가 안 내리고 뭐하냐며 소리쳤다. 나는 당황해서 버스기사에게로 갔다.

여기서 내려야해?

어. 여기서 내려야해.

브로드비치 역은 안 가?

여기가 브로드비치 역이야.

브로드비치 사우스 스테이션이잖아. 버스 정류장에는 브로드비치까지 간다고 되어 있던데?

브로드비치는 역이 아니고 그냥 동네 이름이야. 그리고 이 역이 니가 내려야 할 반환점이야.

아하 그런거였구나. 나는 깨달음(?)을 얻고서,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트램 역에 내린 김에 이 난생 처음 보는 지상철을 타고 가야하나 싶었지만, 지도를 보니 그렇게 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직 시간도 세 시가 조금 넘은 정도였다. 백팩커스월드트래블이 몇 시에 문을 닫는지는 모르겠지만, 걸어가면 적어도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서 시내 구경도 할겸 걷기 시작했다.

골드코스트는 제법 큰 도시였다. 높은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고, 도로도 엄청 넓고 차들도 많이 다녔다. 여태 호주에서 본 마을이라곤 아담한 쿨랑가타 뿐이었던 내게는 굉장히 큰 도시로 보였다. 골드코스트 시내에는 특히 관광버스가 많았는데, 버스에 올라타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아시아 사람들이었다. 아시아 사람들은 시내로 들어갈 수록 많아졌다. 다들 우르르 몰려다니며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댔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배낭여행객도 많이 마주쳤다. 남자고 여자고 다들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진 채로 길바닥에 앉아 쉬거나 어디론가 열심히 가고 있었다. 다들 세계 구석구석에서 왔는지 피부색들도 다양했다.

그렇게 시내를 구경하다가, 문득 비행기에서 바라봤던 해안 도시가 여기였다는게 기억났다. 비행기 창문으로 바라봤던 그 광경을 떠올리니 직접 그 위에 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내를 벗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도시가 바다를 따라 좁고 길게 뻗어있다 보니, 잠깐 걸었는데도 해변이 나왔다.

골드코스트의 바닷가는 대단했다. 해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새파란 파도가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으로 부터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었고, 고개를 돌리면 끝이 보이질 않는 모래 해변이 좌우로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서핑보드를 들고 열심히 파도로 들어가고 있었고, 해변에는 실오라기만 걸친 처자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직접 모래 위에 서서 바라 본 골드코스트 해안은, 하늘에서 본 장관과는 또 다른 느낌의 장관이었다. 나는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해변을 따라 계속 걸었다. 해변을 따라 걷다가 백팩커스월드트래블에 가까워지면 시내로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여유를 부렸다. 몇시나 되었나 싶어서 시계를 봤는데, 어느새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백팩커스월드트래블의 영업시간을 검색해보니 여섯 시 마감이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내가 어느 정도 왔는지 보려고 구글맵을 확인했는데, 아직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아찔했다. 서둘러 해변을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부지런히 걸었더니 다행히 6시 십분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긴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분명 구글맵에 표시된 장소로 갔는데, 거기에는 백팩커스월드트래블 대신 종이 조각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텅 빈 상점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전에 전화를 했기 때문에 이 근처에 있는건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백팩커스트월드트래블이나 그 비슷한 말이 적힌 간판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당황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설마 마쳤나 싶어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여섯 시가 지나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나에게 화가 났다. 골드코스트를 구경하느라 들떠서 너무 여유를 부렸다. 아니 처음부터 마감 시간이라도 알아 놓았으면 여유도 시간 봐 가며 부릴 수 있었을 텐데, 시간 넉넉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바람에 정작 우프 가입은 허탕을 쳐버렸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일이 있긴 했지만, 토요일이라서 아마 안 열것 같았다. 결국 이대로 허탕을 치고 주말동안 멍하니 기다려야 하는가 싶어 힘이 빠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영업시간을 검색해 보긴 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이 주말에도 문을 열었다. 오전 10시 부터 오후 5시 까지.

내일은 반드시 우프 가입부터 먼저 하자. 그렇게 다짐을 하고 여태 온 길을 더듬어 되돌아갔다. 잠시 가다 보니 트램역이 나왔는데, 여기서 트램을 타면 내가 처음 버스에서 내렸던 곳 까지 바로 가려나 싶어 표를 뽑았다. 그런데 반대쪽 트램의 표를 산 것 같았다. 이 표로 반대쪽으로 건너가서 타도 되는걸까? 표는 방향이 아닌 구간만 표시하고 있었기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어서 벌금을 물게 되면 어쩌지? 그래서 트램 표는 그냥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다시 걸었다. 방향도 확인을 안 하고 표를 사다니.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트램역을 지나 우울한 마음으로 다시 걷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다시 아파왔다. 갑자기 몰려오는 끔찍한 복통에, 아예 잊고 있던 어제의 고생이 다시 떠올랐다. 눈 앞이 깜깜했다. 이대로 가다간 길에서 크게 저지를 수도 있겠다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까지 돌아가는 길은 정말 먼 길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버스 정류장에 화장실이 없었던 것 같았다.

도중에 해결을 봐야만 한다는 직감이 왔다. 하지만 하필 지나고 있는 길 주변에는 가정집들 밖에 없어서 공중화장실을 찾을 수도 없었다. 너무 배가 아파서 가정집 문을 두드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그건 그래도 아니지 싶어 계속 걸었다. 분명 뭔가 나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힘겹게 걷다 보니, 그나마 편의점이 하나 나오긴 했다. 우선은 거기서 휴지를 한 팩 샀다. 최악의 상황에 길에서 저지른다면, 휴지가 필요할 것 같았다.

휴지를 산 뒤에는 끙끙거리며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가 산책로에 공중화장실이 있다는게 기억이 나서 해변으로 향했다. 혹시 공중화장실을 못 찾더라도 산책로 수풀에서 일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필 내가 나간 곳에는 오직 모래사장 뿐이었다. 산책로도 없고, 수풀도 없고,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이제 정말 견딜 수가 없는데, 그런 풍경이 나오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혼신의 힘을 다해 참으며, 해변을 따라 꾸역꾸역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산책로는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이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몰래 일을 볼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해변 가장자리에 있는 담벼락으로 향했다. 거기는 나무와 풀들이 우거져서 제법 어두웠기에, 조금이라도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짧은 거리 조차도 내겐 여의치 않았다. 담벼락까지 불과 열 걸음쯤 남겨두고, 결국 힘이 풀려버렸다.

태어나서 단 두 번 있었다. 내 기억이 닿는 한.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딱 두 번 있었다. 그리고 만 24세의 나이에 큰 맘 먹고 호주까지 와서 세 번째를 겪었다. 씨발. 욕이 절로 나왔다.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 설사를 최대한 막아보려고, 이미 기력이 다한 괄약근에 최대한 힘을 줘가며 담벼락 쪽으로 갔다. 겨우 담벼락에 도착해서 바지를 내렸을 때는 이미 한참 저질러버린 후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바지를 벗고 쭈구려 앉아 남은 것들을 마저 내보냈다. 그리고 아까 산 휴지로 뒷정리를 했다.

한참을 미친듯이 닦아내고 나서 다시 바지를 올렸을 때, 설사로 젖은 팬티의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냄새도 심각하게 올라왔다. 버스를 타야하는 이상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래서 팬티는 벗고 바지만 입은 채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다로 갔다. 여기서 팬티와 바지, 그리고 내 몸을 씻어낼 방법은 바다 뿐이었다. 그래서 바닷물 깊숙히 들어갔다. 바닷물이 배꼽까지 올라오는게 느껴진 뒤로는 그대로 해안을 따라 걸었다. 파도가 제법 거셌다. 몸이 떠내려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찝찝함이 더 컸기에, 꿋꿋하게 계속 걸었다.

한참을 파도를 맞으며 걷다보니 그렇게나 찾았던 산책로가 나타났다. 바닷물에서 계속 걷느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산책로가 보이자 마자 바닷물에서 나와 산책로로 향했다. 막 들어선 산책로에는 벤치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걸었다. 걷다 보니 아무도 없는 벤치가 나왔고, 그리고 가서 앉았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손에 든 팬티를 펼쳐서 살펴보니 깔끔했다. 냄새도 안 났다. 한참 동안을 바닷물 속을 걸은게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걸 계속 들고 다니는 것 보단 입는게 편할 것 같아서, 탁자 위에 펼쳐놓고 마르길 기다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잠깐 사이에 다 말랐다. 기능성 팬티랍시고 비싼 돈 주고 샀는데, 그 값을 했다. 팬티카 마른 뒤에는 주위를 잘 살펴보다가, 산책하는 사람들이 없는 순간을 틈타 바지를 벗고 팬티를 입었다. 그리고 다시 바지를 입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산뜻하게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버스의 반환점은 얼마 가지 않아 나왔다. 운이 좋게도 반환점엔 700번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냉큼 뛰어가 돈을 내고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버스에는 아무도 없어서 한적하고 좋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 정거장에서 동네 십대들이 우르르 탔다. 녀석들은 뭐라뭐라 지들끼리 키득거리며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동양인이 신기한건지 우스운건지, 나중에는 대놓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오늘 바지에 설사를 하고 바다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아시안이다 이 자식들아. 밥은 먹고 다니냐.

밤 버스는 낮 버스와 달랐다. 낮 버스가 나긋나긋한 꼬마버스 타요라면, 밤 버스는 ‘Knight Bus’였다. 그래도 Knight Bus 답게 신호는 잘 지켜가며 무섭게 달리던 버스는, 30분 만에 모텔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허겁지겁 옷을 다 벗었다. 세면대에 물을 받고 입었던 옷을 다 집어넣은 다음에 손으로 미친듯이 주물럭댔다. 손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물에 몇 번을 헹궈내고 나서야 빨래를 멈추었다. 그리고 샤워를 했다. 몸에 묻어있던 소금기와 모래가 씻겨져 나가니 비로소 상쾌해질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자려는데, 내일이 마지막 날이란게 다시 생각이 났다. 모텔을 연장해야 할까. 혹시 백팩커스에 자리가 있나 검색을 해 보았지만, 아직도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 머무르기에 모텔은 너무 돈이 많이 든다. 아무래도 내일 백팩커스를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내일 10시 까지 체크아웃하면 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빨래를 좀 말리고 나서 짐 챙겨 나가야겠다.

모텔 앞 버스 정류장
골드코스트 시내에서 가장 한적했던 거리
다 마른 팬티를 입고 산뜻(?)하게 걸어갔던 그 산책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매우 초췌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신명나게 달리는 밤 버스
Like what you read? Give 윤 동현 a round of applause.

From a quick cheer to a standing ovation, clap to show how much you enjoyed this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