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2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제 그 난리를 쳐서 그런지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체크아웃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일어나자마자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커튼을 젖히니 오늘도 햇볓은 쨍쨍했다. 어제 빨았던 옷들을 밖으로 나가서 널고, 짐을 챙겼다. 여기저기 떨어진 쓰레기들을 주워서 한 곳에 모으고, 내가 썼던 수건들도 다시 개어서 침대 위에 두었다. 그리고 나서 널어 놓은 빨래를 확인했더니 그새 다 말라 있었다.

배낭을 다 꾸리고 나서 방을 나오다가, 마침 옆 방을 청소하고 나오던 주인 아저씨와 마주쳤다. 체크아웃 하냐고 묻는 아저씨에게 그렇다고 대답하고 열쇠를 건네주었다.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는 기분에 모텔을 벗어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푹푹 찌는 땡볕 아래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니 금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럴 때 마다 산책로를 따라 나오는 벤치에 앉아가면서, 꾸역꾸역 걸었다. 곧이어 마을이 나왔고, 내가 찾는 ‘샌즈 호스텔’이 보였다. 호스텔 건물은 굉장히 낮으면서도 넓었는데, 2층엔 테라스가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탐스럽게 짙은 그늘이 인도로 드리우고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 고통스러웠던 나는 냉큼 그늘로 들어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숨통이 트이는걸 느끼며 그늘을 따라 쭉 걸으니, 건물 모퉁이에 입구가 있었다. 입구 바로 안쪽에는 리셉션이 있었고, 들어가자 마자 바로 리셉션에 서 있는 직원에게로 다가갔다.

반가워. 날씨 좋지? 예약했어?

나도 반가워. 그리고 예약은 안 했어. 오늘 바로 들어갈 수 있을까?

미안해. 당장은 자리가 없어.

그렇구나. 사실 여기 자리가 있는지 요즘 계속 알아보고 있었는데, 계속 없더라고. 왜 그런거야?

너는 서핑 안하는구나? 그렇지?

맞아. 근데 왜?

여기 쿨랑가타에서 서핑 대회가 있었어. 그리고 그거 보러 온 사람들이 거의 다 여기에 머물고 있었거든. 그래서 자리가 계속 없었던 거야.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그럼 언제쯤 자리가 나는데?

음… 어디 보자… 내일 마침 두 자리가 비네? 내일로 예약할래?

좋아, 예약할게.

그럼 여권 줘봐. 하루 머물거야?

3일 머물고 싶어.

90달러야. 현금? 카드?

현금.

좋아… 예약 됐어. 내일 와서 이름을 말하면 출입카드를 받을 수 있을거야.

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뭔데?

혹시 우프라고 알아?

그게 뭔데?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라는 건데 혹시 들어봤어?

아니, 전혀. 근데 왜?

그렇구나. 난 그냥 이 근처에 우프 책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나 해서 물어본거야.

음, 우프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런 책을 팔만한 곳이 있어.

직원은 지도를 꺼내더니 내가 자주 가던 남쪽 해안가의 상가를 짚었주었다. 나는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에,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이 동네에서 간단하게 우프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들뜨기까지 했다. 곧이어 상가에 도착했고, 직원이 말한 매장에 들어갔지만, 아쉽게도 그 곳에서는 우프를 다루지 않았다.

아무래도 골드코스트에 있는 백팩커스월드트래블 말고는 내게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백팩커스는 내일부터 들어갈 수 있고, 우프 등록하려면 골드코스트로 가야한다. 그럼 차라리 골드코스트로 가서 우프에 가입하고, 그 근처 백팩커스에서 하루 지내고 돌아오는게 어떨까.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고민할 것 없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제처럼 700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브로드비치 트램역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걸을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배낭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튼 트램을 타기 위해선 표를 뽑아야 했다. 어제 검색을 좀 해보니, 표 없이 타도 되기는 하지만, 걸리면 10배라서그냥 표를 뽑기로 했다.

그럼 표는 어디서 뽑나 싶어서 두리번 거리니, 마침 표 뽑는 기계가 바로 보였다. 호주의 도시가 ‘Zone’이라는 구역으로 나눠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기계 화면을 터치하니 골드코스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Zone의 지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Zone을 지나느냐에 따라 돈의 액수가 다르게 표시되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내가 있는 역에서 내 목적지까지 딱 한 구역 거리였고, 그에 맞게 4.5달러짜리 표를 뽑았다.

표를 뽑고 나서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역에 트램 선로가 하나만 있는걸로 봐서는, 이 역이 골드코스트 트램의 종점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트램이 들어왔다. 트램이 완전히 멈춰 선 뒤에, 벤치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질 않았다. 뭐지 싶어서 당황하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사람이 와서 문에 달린 동그란 버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하. 신호등도 트램 문도 다 그런 식이구나. 덕분에 하나 또 배웠기에, 그 사람에게 땡큐라고 한 마디 하고 트램으로 들어갔다.

트램은 가볍게 위잉-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달렸다. 창밖으로는 차들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신호등에서 멈춰서면, 사람들이 바로 창문 옆에서 지나다녔다. 대로를 한참 달리던 트램은 곧 빌딩들 사이로 난 좁은 도로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는 가게 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건물과 가까이 붙어서 달렸다.

창 밖의 풍경은 천천히 흘렀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트램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트램에서 내려, 어제 들렀던 그 망한 가게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백팩커스월드트레블로 전화를 했다. 곧바로 직원이 전화를 받았고, 나는 ‘구글맵을 따라 왔는데 사무실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얼마 전에 자리를 옮겼다고 말하며, 사거리로 나와서 이렇게 저렇게 가면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전화를 끊고 직원이 설명해준 대로 따라 가니, 그렇게나 찾았던 백팩커스월드트래블 간판이 보였다.

사무실은 조그마했다. 안으로 길쭉하게 뻗은 공간의 한 쪽에는 길다란 테이블에 앉은 직원이 두 명 있고, 맞은편 벽으로는 작은 의자 몇 개와 큰 책장이 있었다. 입구쪽 직원 한 명은 어떤 여자와 상담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혼자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일단 의자로 가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혼자 일하고 있는 직원에게 갔다. 그런데 직원에게 말을 거는 순간 직원이 손바닥을 들어보이고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휴일이라서 일을 안해. 그러니까 저 직원에게 가봐.

그래서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내 앞 사람이 상담을 하는 동안, 백팩커스를 검색했다. 마침 무료 와이파이가 무료답지 않게 잘 터졌다. 구글맵을 켜서 지도를 보니, 바로 근처에 엄청나게 큰 백팩커스가 있었다. 심지어 자리도 많았다. 굳이 예약하지 않아도 바로 방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예약을 하려고 해도 직접 가야하니까, 어쨌든 우프를 만들고 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뭔 놈의 상담이 도저히 끝나지를 않았다.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렸는데, 여전히 내 앞 사람은 깔깔거리며 직원에게 뭔가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다. 아직 백팩커스에는 자리가 많았기에 나도 딱히 급할건 없어서 그냥 계속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더 기다리니 결국 앞사람의 상담이 끝났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리를 뜬 후에, 내가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드디어 네 차례네!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괜찮아.

그래, 무슨 일로 왔어?

우프 가입을 하려고.

아하! 잘 왔어. 잠시만 기다려.

직원은 근처의 캐비넷으로 가더니 우프 책을 하나 꺼냈다. 책은 생각했던 것 보다 자그마했다. 책을 챙긴 직원은 작은 종이 하나를 더 챙기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빈 칸을 채워달라며 펜과 종이를 내게 건넸다. 나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직원의 눈길에 부담을 느끼며, 빈칸에 내 이름과 출신 국가, 여권 번호,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우프를 하게 된 계기를 적고 나서 다시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직원은 고맙다고 말하더니, 종이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면서 자판을 두드렸다. 잠시 후 다 됐다! 하고 말하더니, 매직으로 내 회원번호와 가입 날짜를 우프 책에 적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책을 받은 뒤에 70달러를 건네주었다.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은행계좌만 열면 우프를 떠날 준비는 끝나겠구나. 과연 어디로 떠날 수 있을까! 어서 짐을 풀고 우프 책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래서 곧장 백팩커스로 향했다. 내가 검색한 백팩커스의 이름은 Islander Backpackers 였는데, 어마어마한 크기의 빌딩이었다. 백팩커스의 규모도 엄청난데다가 동네 이름도 Surfers paradaise인걸 보면, 아마도 성수기에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모이는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놈의 입구를 못 찾고 헤매다가 빌딩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버렸다. 다행히도 지하주차장 천장에는 화살표가 적힌 이정표가 있었다.그걸 계속 따라갔더니 비상계단이 하나 나왔다. 계단 위로 화살표가 나 있어서 그걸 따라 쭉 올라갔더니, 리셉션이 있는 로비가 나타났다.

다행히 아직 방이 많았다.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듣고 30달러를 지불한 뒤에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서 내렸다. 그리고 내 방을 찾아서 복도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내 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복도의 끝까지 갔을 때, 내 방 번호 바로 직전에서 끊겼다. 층이랑 번호가 관계가 없는건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눈 앞에 보이는 비상계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상계단은 비둘기 똥과 깃털이 가득했다. 숨을 들이쉬니 눅눅하고 탁한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영 찝찝한 그 느낌에 어서 벗어나야겠다 싶어서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 층은 문이 잠겼나보다. 한 층 더 내려갔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살짝 당황해서 5층으로 다시 올라갔다.그런데 방금 열고 들어왔던 문이 잠겨있었다. 식은땀이 났다. 갇힌건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나오는 문 마다 한 번씩 다 열어보았다. 모조리 잠겨있었다. 점점 겁이 났다.

그렇게 계속 내려가다가 결국 어두컴컴한 지하에 다다랐다. 이것마저 안 열리면 어떡하지. 떨리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여태까지완 다르게 손잡이가 많이 돌아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자그맣게 철컥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살았다.

내가 열었던 그 지하의 문은 아까 들어왔던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지하주차장을 통해 다시 로비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번엔 4층을 눌렀다. 방이 어딨는지 감이 안 왔지만, 그냥 4층에 있을 것 같아서 4층에 내렸다. 그리고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비상계단 바로 옆, 그러니까 복도 끝에서 내 방을 찾았다. 도대체 방이 어떻게 배치된거야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피곤해서 그냥 치워버리고 방으로 향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방에 이층침대가 두 개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탁 트인 베란다로 골드코스트 시내와 해변이 모두 보였다. 베란다에서 잠시 경치 구경을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니 아까는 모르고 지나쳤던 누군가의 짐이 보였다. 그 짐은 방 안쪽 아랫침대에 놓여있었다. 다른 침대에도 짐이 있나 싶어 살펴보니 나머지들은 모두 비어있었다.

어디에서 잘까 고민을 하다가, 방 안쪽은 더울 것 같아서 베란다쪽 아랫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방 한쪽에 놓여있는 사물함에 가방과 짐을 넣었다. 사물함 문짝에는 자물쇠를 거는 장치가 있었는데, 자물쇠는 없는 걸 보니 알아서 준비하는 것 같았다. 마침 집에서 챙겨온 자물쇠가 하나 있어서, 그걸로 사물함을 잠궜다.

짐을 다 풀고 난 다음에는 침대에 누웠다. 베란다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방은 조용했다. 내 방 같이 편안했다. 계속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마자, 두 명의 남자가 큰 배낭을 메고 소란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헤이, 버디!” 하면서 인사를 건냈다. 나도 어색하게 “헤이” 하고 인사했다. 쾌활해 보이는 녀석들은 자기들은 독일에서 왔다고 하며 어디서 왔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녀석들은 별 의미도 없어보이는 감탄사를 내뱉고는 방 안쪽 침대를 모두 차지했다. 아랫침대에 있는 짐을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저걸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다시 내 자리에 누웠다. 알아서들 하겠지뭐.

짐을 다 푼 녀석들은 독일말로 열심히 떠들어댔다. 백팩커 생활은 처음인지라, 어떻게 말을 거는게 좋은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녀석들이 독일말로 떠들어대서 그냥 입 다물고 누워서 쉬었다. 그냥 맘 편히 있자. 아무리 백팩커스라고 하지만, 억지로 친해지려고 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한참 떠들던 녀석들은 잠시 후 나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마음이 편했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문득 아까 리셉션에서 나눠준 종이가 생각났다. 그래서 종이를 꺼내 펼쳐보니 거기엔 약도가 있었다.

약도를 보니 백팩커스 바로 근처에 서브웨이가 있었고, 맥도널드도 있었다. 이런저런 술집과 카페, 식당들도 있었다. 그리고 약도 한 쪽 구석에 할인 목록이 있었는데, 방 열쇠를 보여주면 약도에 나온 식당이든 술집이든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마침 배도 고팠는데 잘 찾았다 싶어서 바로 방을 나섰다. 처음에는 들뜬 마음에 식당을 가볼까 했지만, 현지인들과 섞이는게 덜컥 겁이 나서 그냥 간편하게 서브웨이를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나는 서브웨이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도 잘 몰랐다. 그나마 한국에서 세 번 정도 가본게 다였다. 그래서 메뉴라도 알아가자는 생각에 부리나케 검색을 했다. 그리고 열심히 되뇌며 외웠다. 먼저 빵과 빵의 길이, 빵에 들어갈 기본 메뉴를 고른 뒤에 채소와 소스를 고르면 된다. 먼저 빵과 빵의 길이, 빵에 들어갈 기본 메뉴를 고른 뒤에 채소와 소스를 고르면 된다. 먼저 빵과 빵의 길이, 빵에 들어갈 기본 메뉴를 고른 뒤에 채소와 소스를 고르면 된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도착한 서브웨이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많이 피곤해 보이지만 너무도 귀여운 여직원이 인사를 하며 맞이해주었다.

어서와. 어떤걸로 할거야?

음 나는 플랫 긴걸로 할게.

뭐라구?

플랫 긴거.

풋롱 말하는거야?

응?

풋롱 말하는 거냐고.

아아 그래 맞아. 플랫 풋롱으로 할게.

그리고?

어… 터키로 줘.

치즈는?

뭐?

치즈는 뭘로 할거냐고.

어… 치즈는 괜찮아.

토스트?

응?

토스트 할거야?

아냐 괜찮아.

채소는 뭘로 할래?

음… 토마토랑 오이랑 배추랑 양상추랑 당근이랑 올리브 줘. 올리브 많이 줘.

알겠어.

소스는 뭐로 할래?

스위트 칠리로 줘.

주문 순서를 열심히 외워갔지만,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발음과 예상치 못한 나의 버벅임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가뜩이나 피곤해 보이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보려니 그것 또한 조마조마한 일이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치즈도 빼버리고, 토스트도 건너뛰어 버렸다. 그렇게 어버버거리며 주문을 하다보니, 샌드위치가 완성되긴 했다. 샌드위치가 다 포장된 후에, 계산을 하면서 방 열쇠를 보여주었다.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아일랜더 백팩커스에서 머물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음료가 공짜라고 말했다. 나는 사이다를 골랐다. 그녀는 컵에 사이다를 따르고, 샌드위치와 함께 봉투에 넣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버벅댄게 부끄러워서, 봉투를 받자마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래도 샌드위치 냄새는 향긋했다. 군침이 고였다. 어디서 먹어볼까 하고 두리번 거리니, 주변에 벤치가 많이 보였다. 얼른 먹고 싶은 마음에 아무 벤치로 가서 앉아서 샌드위치 포장을 벗겨냈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난데없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심지어 바람도 엄청나게 불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엄청 맑았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근처 빌딩의 주차장으로 대피했다. 소나기인가 보다 하고 주차장 화단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비가 그치질 않았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 심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그냥 주차장 화단에 앉은 채로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바람이 내 쪽으로 불 때 마다 비가 조금씩 날아들어와 빵이 축축해졌지만, 처량한 맛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추워졌다. 이대로 있다간 감기 걸릴수도 있겠다 싶어서 백팩커스로 뛰어갔다. 방으로 돌아갔을 땐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서 베란다 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와 산뜻한 비 냄새가 솔솔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인기척을 느껴 잠에서 깼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아랍인이 한 명 서있었다. 녀석은 내가 잠에서 깬걸 보더니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 누가 짐을 푼지 알아?

응. 독일인 두 명이 와서 짐 푸는걸 봤어.

여기 내 자린데?

아 ,그래?

음 얘들 어디 갔는지 알아?

난 몰라.

너는 그 침대가 니 침대 맞아?

그런게 있었어?

방 열쇠에 보면 침대 번호가 있어.

어 진짜네. 난 4번이야.

4번이면 여기네. 내 바로 위.

아하. 그리로 옮겨야겠네.

우선 얘네 짐을 옮기자. 어차피 얘네 둘은 창가 침대 위아래에서 자야하니까.

알았어.

우리는 우리 침대에 놓인 독일애들의 짐을 남은 두 침대로 옮겼다. 다 옮기고 나서 내 짐을 옮기는데, 마침 독일애들이 들어왔다. 당황해하는 녀석들에게 아랍인 녀석이 열쇠에 적힌 번호와 침대 번호에 대해 설명을 했다. 독일 애들은 “아하” 하더니 별 말 없이 자기네 짐을 정리했다.

우리 넷은 어색하게 한동안 방에 있었다. 별 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 나도 그냥 계속 우프 책을 읽었다. 그렇게 시간이 제법 지나 해질녘이 되자 갑자기 독일 애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들은 머리를 빗고 겨드랑이에 뭔가를 막 뿌려대며 소란을 떨더니, 방을 나갔다.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랍 녀석의 잠 자는 숨소리만 작게 들렸다. 나는 계속 우프 책을 보았다.

우프 책의 첫 페이지에는 우프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었다. 책에 따르면, WWOOF란 ‘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의 약자로, 친환경적인 농장에서 일손을 제공하고 숙식을 제공받는 자발적인 참여활동을 의미한다. 우프는 ‘Working Weekends on Organic Farms’라는 이름으로 1971년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점차 그 성격이 바뀌어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로 바뀌었다. 하지만 Workers라는 말이 자발적인 자원봉사자인 우퍼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여태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로 알고있었던 나는 그제서야 우프의 제대로 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우프는 ‘우퍼’와 ‘우프 호스트’의 관계로 이루어지는데, 우퍼는 자발적인 우프 참여자이고, 우프 호스트는 친환경농장을 운영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 일정 회비를 내고 우프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우퍼는 우프 호스트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성실하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프 호스트는 우퍼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숙식과 일정 시간 이하의 일을 시켜야 하고, 무엇보다 그들을 노동자로 부려먹으면 안 된다. 만약 우퍼가 의무를 저버리면 우프 호스트는 우퍼를 쫓아낼 수 있고, 우프 호스트가 의무를 저버리면 우퍼는 언제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퍼와 우프 호스트는 우프 활동을 통해 서로 돕고 문화를 교류하는데 중점을 둬야지, 우프를 이용해서 우퍼가 우프 호스트의 집에서 무위도식하거나 우프 호스트가 우퍼를 머슴으로 부려먹으면 안된다.

호주는 거의 대륙과 맞먹는 크기의 나라이다. 그에 걸맞게 농업의 규모도 거대한데, 정작 인구는 우리나라의 절반인 이천만명 정도 뿐이라서 항상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워킹 홀리데이나 이민을 적극 장려해왔고, 이를 통해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농장이나 공장에 노동력을 채워왔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우프도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되어 왔는지, 호주에만 무려 2500개가 넘는 우프 농장이 있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대형 농장이 아닌 작은 가족 농장들인데, 이들도 호주의 농축산업에서 나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도 아니고 전부 그런 것도 아니지만, 꽤 많은 대형 농장들과 공장들이 워킹홀리데이 외노자들로, 그리고 꽤 많은 가족 농가들이 워킹홀리데이 우퍼들로 돌아간다고 말을 해도 될 것이다.

우프 책을 더 넘겨보니, 책에 쓰인 약어들에 대한 설명이 잠시 나오다가, 본격적으로 지역에 따른 우프 호스트들의 자기 소개들이 나타났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우프 호스트들의 자기 소개인데, 어찌나 많은지 너무도 빽빽해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맨 앞에 나온 지역은 타즈매니아였는데, 나는 당장 타즈매니아에 갈 계획은 없었지만, 대강 어떤지 보자는 생각으로 앞에서 부터 하나씩 읽었다.

우프 호스트들의 소개문들은 정말 가지각색이었다. 글에서부터 성격이 확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간단하게 적어버려서 소개같지도 않은 소개들도 있었다. 너무 쓸데 없는 말을 많이 적어서 정작 필요한 정보는 찾기 힘든 글들도 제법 보였다. 농장의 종류도 다양했다.대부분은 밭작물이나 나무를 기르는 곳들이었는데, 그 외에 버섯농장도 있고, 대나무 공예소, 말 목장, 소 목장 등 다양한 목장들도 있었다. 심지어 굴 양식장도 있었다. 또 농장이라기 보다는, 자급자족하는 친환경적 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곳들도 있었다. 그리고 뭔진 잘 모르겠지만 요가 마을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우프는 대강 하루에 5시간 정도 일을 하며, 주말에는 쉬는 것 같았다. 우퍼들이 하는 일은 정말 간단한 일들 뿐이었는데, 주로 잡초 뽑기, 비료 주기를 비롯한 작은 잡일들이 다였다. 그리고 내 기대와는 달리,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같은 집에서 자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퍼들을 따로 캐러반이라는 이동식 집이나, 텐트에서 재우는 곳들이 많았고, 식사도 그냥 재료들만 챙겨주고 우퍼들이 알아서 따로 챙겨먹어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우퍼들이 많으면 그래도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정작 우퍼 한 명 받으면서 그런식으로 격리하는 곳이 많았다. 우프의 취지와는 달리 그냥 우퍼를 노동력으로만 쓰려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이것도 겪어봐야 알 일이다. 하지만 우퍼를 가족처럼 가정 깊숙히 들이려는 우프 호스트들이 있다는 점이, 저런 호스트들을 뭔가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내가 우프를 하는 목적은, 최대한 호주 가정에 깊숙히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내가 평생 살아왔던 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를, 전혀 다른 자극을 받는 것이 나의 목표다. 돈을 버는 것은 크게 우선 순위에 두지 않았다. 우프를 몰랐을 때에는 워홀생활이란게 전부 알바자리 구해서 돈 벌어가며 사는 것인줄 알았고, 나도 마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호주에서 워홀러로서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했다. 물론 한국보다 호주의 임금이 훨씬 높기 때문에, 여기서 돈을 버는게 한국에서 버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한국에서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 같았다. 여기 와서 전혀 다른 자극을 받으면서, 고여가는 내 생각에 물꼬를 트고 내 삶의 전환점을 찾고 싶은데, 한국에서 사는 방식을 그대로 몸에 두르고 와서 지낸다면 아무리 일년이라 할지라도 내가 얻는건 수박 겉핥기식 자극과 생각의 전환일 뿐일 것 같았다. 그래서 우프로만 워홀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여기 온 것이다. 물론 맘대로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런 쪽으로 내 소중한 젊은 날의 시간들을 보내고 싶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프 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책을 내려놓고 나니 문득 출출함을 느꼈다. 뭔가 먹어볼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비는 그쳤고, 하늘은 맑았다. 그런데 식당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줄도 길고 너무 북적거렸다. 찌질한 나는 도저히 혼자 밥을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서브웨이나 먹을까 하다가, 그냥 굶기로 했다. 대신 맥주나 한 캔 마시고 자자 하는 생각에 주변에 편의점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보이질 않았다. 대신에 근처에 ‘Bottle Shop’이라 적힌 간판을 봤고, 왠지 술을 팔 것 같아서 들어가 보았다. 역시나 각종 술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심지어 소주도 있었다. 맥주도 어찌나 종류가 많은지 처음 보는 것들 투성이였다. 뭘 마실까 고민하다가, 그냥 평소에 마시던 아사히 캔을 하나 꺼냈다. 배나온 주인 아저씨와 짧게 인사하며 계산을 하고선 바닷가로 나갔다. 왠지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마시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낮에는 한산했던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자전거 택시들이 무슨 쿵쿵거리는 클럽음악 같은걸 크게 틀고선 사람들을 태우고 지나다녔고, 벌써부터 술 취한 사람들이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광란의 밤이 시작되는구나. 바닷가에 도착하니 중심가보다는 훨씬 조용했다. 여전히 술 취한 남녀들이 모래사장 위에서 난리였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도 있었고, 노숙자 아저씨들도 벤치 여기저기에 누워있었다. 여튼 조용히 바다 보면서 맥주 마실만 했다.

밤에도 파도는 여전히 거대했다. 갈매기들은 떼를 지어 다니면서 길에 떨어진 음식물들을 줏어먹었다. 그거 구경하면서 맥주 홀짝거리다 보니 어느새 다 마셔버렸다. 알딸딸했다. 보통 맥주 마시면 세 병은 마시는데, 오늘은 한 캔 마셨더니 제법 어지러웠다. 알딸딸하니 잠도 슬 오는 것 같아서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11시 반쯤 방에 들어가니, 독일애들은 광란의 밤을 위해 나갔는지 방에 없었고, 아랍 녀석은 여전히 자고있었다. 나도 자야겠다 싶어서 옷을 갈아입은 뒤에 대충 양치를 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잘 수가 없었다. 밖이 너무 시끄러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또라이들이 늘어갔고, 나중에는 백팩커스 빌딩 베란다 마다 인간들이 나와서 음악을 크게 틀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가관이었다. 그 와중에 잘 자는 아랍인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렇게 고통받고 있으니, 여기서 하루만 머물고 다시 조용한 쿨랑가타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문득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한 시 쯤 되어서 독일애들이 술이 취해서 들어왔다. 방에 들어온 녀석들은 창문이란 창문을 다 닫아버렸다. 감기 걸린 것 같다면서 문을 다 닫아버린 녀석들은 깝깝하다며 옷을 다 벗은 다음에 잠이 들었다. 술에 취해서 멍청해진걸까. 더우면 문을 열던지. 굳이 문 닫고 옷 벗는 이 녀석들 때문에 나는 왜 찜통같은 방에서 자야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자보려 했지만 깝깝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들이 잠들었을 때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창문 틈 새로 산뜻한 공기가 들어왔다. 숨통이 트였다.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백팩커스에서 예약을 하고 상가로 가는 길에 그늘에 앉아 잠시 쉬었다.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골목길은 항상 내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 준다.
저 동그란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
백팩커스월드트래블에 앉아서 찍은 거리의 모습.
드디어 손에 넣은 우프 책. 생각보다 디자인이 구리다.
벤치에 앉았는데 유리에 내가 비치길래 심심해서 찍어봤다.
방을 잡고 나니까 열쇠와 함께 웬 종이를 하나 줬다. 로비에 앉아 잠깐 쉬며 괜히 쓸데없이 열쇠랑 종이를 찍어봤다.
복도 끝 문을 열고 무심코 들어갔다가 갇히게 된 비상계단
비둘기 똥이 가득해서 냄새는 끝내줬지만, 경치 하나는 괜찮았다.
방에 들어서자 마자 사진을 찍었다. 태어나서 처음 방문한 백팩커스여서 그런지,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백팩커스 근처의 보틀샵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아사히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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