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8

아침에 일어나서 배고프면 뭐 먹고, 시간 남으면 우프 책 좀 보다가, 이민성에서 답장 왔는지 확인 몇 번 하고, 잠오면 자는 생활을 한지가 벌써 한 주가 다 되었다. 뭔가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산책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매번 남쪽 해안가에 있는 마트에 갈 때 마다, 그 너머로 이어지는 해안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한 번 가보자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발가벗은 애기와 만났던 그 벤치를 지나서 마트 쪽으로 가니,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니 바위 해안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긴 산책로가 보였다. 산책로 한 쪽으로는 바위 해안이 쭉 이어졌고, 한 쪽으로는 잔디밭과 마을이 있었다. 바위 해안은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강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마 내가 걷고 있는 지점이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곳인 것 같았다.

산책로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잔디밭에 나와서 햇볕을 쬐는 동네 아재들만 간간히 보였다. 조용했다. 경치를 구경하면서 산책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난생 처음 보는 도마뱀들을 보았다. 얘네들은 바위 색깔과 비슷해서, 그냥 보면 구별이 잘 가질 않았다. 하지만 녀석들 근처로 걸어가면, 햇볕을 쬐던 도마뱀들이 발소리에 놀라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람에 찾기가 쉬웠다.

햇빛을 쬐느라 바위 위에서 고개를 쳐들고 가만히 있는 이 도마뱀들은, 크기도 제법 컸다. 마을을 걸어다니면 벌레 대신 조그만 도마뱀들이 빠르게 뛰어다니는걸 자주 볼 수 있는데, 해안가에 있는 녀석들은 다른 종인지 크기가 내 팔뚝만했다. 이 큰 녀석들이 가만히 숨어 있다가, 내 발소리에 놀래서 갑자기 움직이면 오히려 내가 깜짝깜짝 놀랠 정도였다.

산책을 하다가 햇빛이 너무 따가워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잠시 앉아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데, 팔뚝만한 도마뱀들이 천천히 벤치로 다가왔다. 평소에 사람들이 여기에서 뭘 먹고 부스러기를 남기는지, 아까는 열심히 도망가던 녀석들이 이제는 다가오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좋은 기회였다. 나는 녀석들이 도망치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니 녀석들은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잔디에 있는 벌레인지 음식물인지 모를 것들을 주워먹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커다란 도마뱀들이 내 앞을 어슬렁 거리며 뭔가 열심히 주워먹고 있다니. 뭐라할까… 경이로웠다.

도마뱀들은 한참동안 느릿하게 뭔갈 줏어먹고 다니더니, 다시 바위와 풀숲으로 돌아갔다. 좋은 구경이었다. 움직이지 않느라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한게 좀 아쉬웠다.

도마뱀들이 돌아간 뒤에는 나도 다시 일어나서 산책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한참 걷다보니 점점 마을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웬 다리가 나왔는데, 다리 너머로 새로운 마을이 보였다. 마치 공원같았다. 다리 앞에는 The Anchorage Islands라는 푯말이 있었다. 섬 마을인 것 같았다. 그럼 이 다리가 입구겠구나 싶어서 다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내 오른쪽으로, 강물을 따라 펼쳐진 마을이 보였다. 마치 엽서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집 앞에는 도로 대신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집집마다 보트가 하나씩 묶여있었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서 그 풍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참 내가 사는 곳이랑 딴판인 곳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다리에 기대어서 마을 구경을 하다가,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밀물 때인지 돌고래들이 강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다. 햇빛은 조금 수그러 들어서 걷기 좋았다. 왔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니 산책로가 끝나고 울월스가 있는 상가가 보였다. 여기까지 온 김에 오늘은 여기서 먹을거리를 사자는 생각으로 곧장 울월스로 들어갔다. 과일을 먹어볼까 하다가, 통조림 맛을 조금 더 보고 싶어서 통조림 코너로 갔다. 마침 4개 셋트로 할인하는 통조림이 있어서 각기 다른 맛으로 하나씩 골라서 나왔다.

마트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있었다. 해변을 따라 걸으니 저 멀리 골드코스트의 빌딩들이 보였다. 그리고 너머로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걸 다 구경한 후에 밤이 되어서야 백팩커스에 도착했다. 통조림 맛이 너무 궁금해서 후딱 씻은 뒤에 주방 밖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하나를 깐 다음에, 포크로 내용물을 건져냈다. 하지만 국물만이 출렁거렸다. 내가 소스를 샀나? 당황해서 캔 바깥부분을 읽어보았다. 분명 소스란 글자 대신 BIG’N CHUNKY BEEF 라는 글자 뿐이었다. 게다가 감자와 당근과 고기가 큼지막하게 들어있을 것 같은 그림이 떡하니 붙어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포크를 휘저어 보아도 오직 국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주 약간의 감자와 당근이 포크에 걸려 올라왔고, 고기조각은 찾기도 힘들었다. 강한 창렬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한 통을 다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엔 국물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 남은 세 개도 모조리 까 먹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냥 다양한 맛의 국물 뿐이었다. 다음부터는 이 통조림을 절대로 사먹지 않으리라. 창렬 1호 HEI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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