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여행기

둘째날 — 아는만큼 보이는 것들

어떤 장소를 갔을 때, 그냥 무심하게 보는 것과, 사전지식을 알고 보는 것과, 내가 갔던 곳을 나중에 책이나 잡지로 접했을 때의 느낌은 각각 다르다. 특히 세 번째의 경우 본래의 느낌에 새로 알게된 정보가 덧입혀져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대수롭지 않아도 내게는 특별한 장소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제 써 나갈 곳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침부터 먹방은 시작되고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숙면을 취하고 보니 벌써 해는 중천에 떴다. 본래 숙소 근방에 있는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시간은 어정쩡했고 무엇보다 아침식사를 해야 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숙소 맞은 편 상가 건물에 있다는 푸드코트를 가기로 했다.

아침식사로 먹은 국수. 국물이 없는 것으로 주문하면 만둣국을 같이 준다. 양념은 빨갛지만 생각보다 맵지 않았다. 그리고 그 국수를 팔던 가게.

여행을 준비하며 자주 방문하던 여행 관련 블로그에서 이곳의 정보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숙소에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보이는데 그래도 안갈 수 있을까? 푸드코트 안에 매장이 여러 곳인데, 유심히 살펴보니 가려던 그곳이 보였다. 국수는 봤던대로 Dry를 주문했더니 사장님이 빨간 양념을 보여준다. 맵냐고 물어보니 그렇게 맵지는 않단다. 체질상 매운 음식만 봐도 땀이 날 정도인데 간장과 고추기름이 섞인 양념은 우려했던 것에 비하면 맵지 않았다. 꼬들거리는 국수에 얹어진 아삭아삭 씹히는 생 숙주 덕분에 식감마저 좋았다. 게다가 만둣국까지 한 세트라 생각보다 속은 든든했다.

아침도 잘 해결했으니 이제 못 샀던 유심카드만 사면 된다. 어제 갔던 래플스 시티의 싱텔 매장으로 가는 길에 차임스(Chijimes)를 잠깐 구경했다. 원래 수녀원과 고아원이었는데 지금은 카페와 음식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원래 건물을 훼손하지도 않고 잘 보존해서 활용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보는 차임스는 한적했다. 저녁이 되야 멋질 것 같은데 그 때 못 가본 것이 아쉽다.

차임스 입구, 그리고 한때 성당이었을 건물
성당 건물 뒷쪽, 그리고 뒷쪽에 있던 꽃들

잠깐 구경을 하고 래플스 시티의 싱텔 매장에 갔는데 역시나 없단다. 그러면 왜 다음날 아침에 오라고 했을까. 지하의 환전소에 있다고는 하는데 정작 그곳을 못 찾았다. 약간 허탈한 기분으로 지하 매장을 걷는데 마침 카야 토스트를 파는 곳이 보였다. 그래도 싱가포르를 왔는데 카야 토스트도 먹어줘야 예의가 아닐까 싶어 매장에 들어가 카야 토스트 셋트를 주문해서 먹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야쿤 카야 토스트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먹어봐서 그 맛을 대충 알기에 새로운 곳에서 먹고 싶었는데 마침 야쿤의 경쟁업체(?)인 토스트박스를 발견해서 나름대로 소원도 풀었다. 본고장에서 먹는 카야 토스트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는데 큰 차이는 없었다. 토스트가 바짝 구워져 더 바삭한 정도랄까. 아! 세트메뉴에 딸려 나오는 달걀이 두개였다. 간장소스와 후추를 뿌려 먹는 수란과 토스트 그리고 연유가 들어간 진한 커피-현지에서는 코피(kopi)라고 부른다- 는 기묘하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본의 아니게 아침을 먹고 연달아 간식인지 식사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토스트를 또 먹게 되었다. 이른바 먹방을 찍고 우리의 발걸음은 티옹바루(Tiong Bahru)로 가는 전철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타박타박 티옹바루를 걷다

전철을 탄 시티홀 역에서 티옹바루는 전철로 몇 정거장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원래 1930년대에 지어진 저층 플랫들이 많은 곳인데 최근 몇년 사이 음식점, 카페, 서점, 편집샵 등이 들어서며 유명해진 곳이라고 한다. -여행서적에 주로 이렇게 소개된다.- 전철에서 내려 우선 이지링크(교통카드) 충전과 현금인출을 했다. 교통카드 기능이 탑재된 신용카드로 찍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된지라 충전기 앞에서 기능을 익히느라 머뭇거렸다. 이때 나타난 친절한 현지 여자분의 도움으로 충전을 할 수 있었다. 무려 충전을 마칠 때까지 떠나지 않고 봐주기 까지… 이어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조달도 했다. 마음속으로 ‘씨티은행 국제현금카드 만세’를 조용히 외쳤다.

심카드 없는 스마트폰은 팥소 없는 찐빵과도 같기에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찾아 헤맸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인천공항에서 애초부터 로밍을 해간 친구 덕분에 길을 찾아 다닐 수 있었다. 저층 플랫들을 지나며 구글맵이 알려주는대로 따라 타박타박 걸어가다 보니 티옹바루 시장이 나왔다. 이제 여행책자에 나왔던 그곳들이 서서히 보이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시장 맞은 편 편의점에서 ‘심(SIM)봤다’. 공항에서부터 찾았던 싱텔 심카드가 없으면 아쉬운대로 다른 제품을 살 생각이었다. 카드 종류를 놓고 점원과 이야기를 하다 얼마나 체류하는지를 묻기에 3일 남았다고 하니 그러면 이걸 사라며 내놓은 것이 그렇게도 사기 힘들었던 그 심카드였다. 그때 속으로 ‘심봤다’를 외쳤다. 내가 심마니도 아닌데… 냉큼 사서 핸드폰에 끼워 넣고는 떠날 때까지 잘 터지는 싱텔 4G 망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다녔다. 이를테면 구글맵 보기, SNS에 사진 올리기, 체크인하기, 가족들에게 카톡하기, 주절주절 글 올리기 등등.

티옹바루의 저층 플랫은 이렇게 생겼다. 1930년대에 지어졌다고 하니 80년이 넘은 건물이다. 독립기념일이 지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외벽에는 국기가 걸려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깃대에 달아 게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길을 지나다 발견한 말로만 듣던 장대에 빨래 널기. 이곳은 낮은 층 주택가에 예쁜 꽃과 나무들이 군데군데 있어 예뻤다.

이제 심카드 구입이라는 큰 숙제를 해결해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구글맵으로 가보려고 별표를 찍어놨던 장소들을 가보기로 했다. 티옹바루하면 늘 소개되던 곳들은 용시악 스트리트(Yong Siak Street)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빵빵하게 잘 터지고 데이터 용량까지 후한 -당시 무려 100GB였음!- 싱텔 4G망을 날개 달듯이 장착한 구글맵을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슬슬 걷다 보니 가이드북에 나왔던 장소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용시악 스트리트에 들어선 것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길목에 옹기종기 서점과 카페 편집샵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만일 티옹바루에서 길게 구경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용시악 스트리트만 둘러보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작지만 예쁜 곳이었다. 내 기억에는.

여기는 말로 설명하기보다 사진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사진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용시악 스트리트로 가는 길에 있었던 뎀시힐에서 인기 많다는 PS Cafe의 분점이 여기에도 있다. 아담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티옹바루 하면 가장 먼저 소개되는 곳이 북스 액추얼리(Books Actually) 서점이다. 독립서점으로 빈티지 소품이나 문구류도 판다.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도 있다. 무려 세마리…
북스 액추얼리의 상징인 고양이들. 세마리 중에 두마리만 본 것 같다.
그림책 서점인 Woods in the Books. 여기서 조카들과 대녀들에게 선물할 무민 그림책을 샀다. 책 구경을 하다 Harry라는 그림책이 있어 해리 포터일까 윌리엄 왕자의 동생인 해리 왕자일까 궁금해서 보니 그 당시 몇달 전 유명을 달리한 고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의 자서전이었다. 어린이들 대상으로 쓴 그림책이었는데, 해리는 리콴유의 영어 이름이다. 3권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봤던 부분은 리콴유가 영국유학을 가서 나중에 합류한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돌아와서 법조계를 거쳐 정계에 진출해서 총리가 되기까지였다.
역시 티옹바루 하면 빠질 수 없는 유명하다는 컵케이크 카페 Plain Vanilla. 이미 뭔가를 먹은 상태라 컵케이크를 사먹을 엄두는 안 났다.
너무 유명해져서 사람이 많은 스페셜티 커피집인 Fourty Hands에서 아이스 블랙으로 더위를 식혔다. 친구와 담소도 하고 갖고 갔던 아이패드로 지도도 보고 전날 썼던 비용들도 적으며 시원한 커피 한잔과 함께 잠시 쉬어갔다. 친구 말이 여기 브런치가 맛있다고 소문났다며 나중에 말하는데 먹을걸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리고 여기는 번호가 쓰인 나무토막이 번호표다. 특이했다.
바깥 테이블까지 손님들로 만원이었던 Fourty Hands를 나오며.
용시악 스트리트를 나와 티옹바루 시장 방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본 제사상. 중국인들의 특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서점과 편집샵 구경도 했고 조카들과 대녀들에게 선물할 그림책도 샀고, 시원한 커피도 한잔 마셨으니 이제 이동할 때가 되었다. 티옹바루 시장 근처에서 봤던 티옹바루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들고 가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곤트란 쉐리에와 합작으로 만든 곳이라 크로와상이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지나갈 때 맛집 프로그램을 촬영하는지 주변에 카메라와 여러 사람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유명한 곳이 맞았다. 나는 가장 유명하다는 크로와상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몬드 초코 크로와상 류의 빵을 샀다. 이어 친구는 티옹바루 시장에서 망고스틴 한 봉을 사들고 왔던 길 그대로 티옹바루 역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티옹바루 베이커리 광고판이 있던 자전거, 점포 기둥에 있던 티옹바루 베이커리 로고, 그리고 티옹바루 베이커리 전경.

지금 생각해보면 티옹바루는 사람이 많아지기 전의 홍대나 서촌 느낌이 난다. 저층 플랫과 상점들이 어우러져 있지만 주거지의 비중이 더 높은 것 같았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느낌이 기억에 남는다. 여행 중에 샀던 리콴유 자서전인 ‘싱가포르 스토리’를 나중에 읽는데 이곳이 등장한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리콴유는 학업을 중단하고 호구지책으로 고무풀 장사를 하게 된다. 학교 동기와 동업 관계라 수시로 티옹바루에 있던 동기의 집을 왕래했다고 나온다. 그 당시 티옹바루의 모습을 낮은 저층 플랫군이 즐비하던 곳이라고 묘사했던 것 같은데 내가 봤던 그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무심코 지나갔던 길이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도 거쳤겠지만, 역사적인 인물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간에- 지나갔던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꽤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행자의 입장으로 다녔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티옹바루에 대한 기억은 내게 다르게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여행기를 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생각나는대로 끝까지 잘 쓰기를 바라며. 다음 이야기도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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