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래동 3가 58번지의 골목을 사진찍고 있을 때 한 기술자분이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분들은 기자들과 관괭객들이 사진을 찍고 블로그나 잡지에 글을 올리며 말썽을 일으켰던 사실을 오래 보아왔다.

집단의 먼지

서울 문래 예술촌 젠트리피케이션의 초상

현재 거리미술의 핫스팟임에도 불구하고 문래 예술촌은 사실 예술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1955년에 처음 금속공장이 세워진 이래 문래동은 서울 금속공업의 중심지가 되어왔으며 2003년에 들어서야 비로서 대학로와 홍대 지역에 머물던 예술가들이 높아져가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임대료가 싼 문래동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8년 동안 이 지역 예술가들의 수는 20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이 등장하고 나서 문래지역은 지역의 문화적, 경제적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문래동의 최고참 기술자들은 이 지역이 순수한 공업지대에서 점점 쓰임새가 복잡해지는 모습을 보아왔다. 근처의 신도림동이나 영등포의 아파트 건물들이 문래동에서 멈춰진 사실은 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해 준다.

빈민가를 고급화시키는 예술가

문래동으로 예술가들이 유입되던 초기에는 새로 이주한 아티스트들이 공장 노동자들과 건물을 공유하면서 평화롭게 지내기도 했다. 5년 전 세 명의 동료 사진가들과 ‘빛타래 갤러리’를 연 사진가 채씨는 예술가들과 공장 기술자들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사진가 예병현씨가 10년 전 문래동에 이주했을 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예씨는 문래동에 왔던 첫해에 사진을 찍었던 재미난 일들을 회상한다. (왼쪽, 예병현씨 제공 사진). 그는 기술과 예술마을 공동체를 위해 기록했던 경험을 비롯해 몇 차례 이 지역의 변화를 목격했다.

“낮 시간은 노동자들의 것이며, 예술가들은 어차피 야행성이죠”. 서로 가깝게 왕래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낡은 건물을 고치고 그 안에서 살아가려는 예술가들의 열정 덕분에 공장사람들과 조화를 이뤘던 것이다. 건물주들은 예술가 덕분에 찾아온 발전의 기회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얼마지 않아 다수의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예술가들 자신이 개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부에서도 1세대 예술가들의 벽화나 거리예술작품들이 매력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2008년 도시문화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문래 예술공장이 2010년도에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문래 예술촌”이라는 공식 버스 정류소명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이는 이는 문래지역의 투자를 불러일으킨 불행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스튜디오 ‘숲’ 앞에 선 아티스트 김순미씨. 예전에 금속 셔터와 플라스틱이 있던 자리의 커다란 창문과 식물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순미씨는 작업실을 수리하고 청소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도시재생으로서의 관광

2012년 정부는 사회적 기업가 이소주씨가 기획한 문래동의 예술과 역사를 외부에 알리자는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전국에 걸쳐 이 지역의 탐방이 인기를 끌었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문래동은 트렌디한 사진촬영의 명소로 떠올랐다. 초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점점 늘어가는 방문객들의 숫자, 위험한 공장작업에 대한 불감증,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의 초상권에 대한 무시 때문에 이들은 노동자들의 사적인 작업공간에 대한 침입자가 되고 말았다.

관광객들의 우측 벽에 보이는 구멍들은 독일 예술가 얀 포어만의 레고 블럭들로 채워진 적이 있었다. 문래동 기술자들은 이 지역에 관광객들이 덜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 이 레고들을 2015년에 철거했으나 다른 요소들이 문래동을 더 인기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관광지화”의 과정에서 기술자들은 볼거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2015년 말 그들은 무례한 관광객들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어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다수의 벽화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예술작품을 철거하는 행위는 질서를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으나 지워진 벽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소비공간들이 방문객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 지역의 개발경향에 따라 레스토랑, 바, 카페들이 급속하게 생겨났다. 많은 공간들이 문래라는 이름이 주는 공장지대의 “특별함”과 산업적인 미학을 활용했지만 실제 지역 주민들이 활용하기엔 무리였다. 사업주들은 기존의 공장들이 자신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사실, 혹은 현존하는 이 지역의 문화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역문화가 볼거리로 전락하고, 자본주의의 목적에 따라 상품화되는 한 공장과 원주민들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넘쳐나는 커피숍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의 업주들 가운데 탐욕을 넘어서는 진실된 사고를 하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변화에 대해서 모두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양키스버거와 람슈튠 금속공방은 양키스 슬라이스 피자(왼쪽)를 함께 개업했다. 양키스 슬라이스 피자는 개업하자 마자 20대와 30대의 젊은 고객들로 가득 찼다. 공장 기술자들은 그 지역 물가에 비해 비싼 가격 때문에 거기서 식사를 하는 적이 많지 않다.
양키스 슬라이스 피자는 2016년 중반에 생겨난 많은 식당들 가운데 하나다. 58번지의 다른 많은 식당들과 마찬가지로 이 식당은 금요일 밤 문래동의 명소가 되었다.

1987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해온 박 지훈씨는 이 곳을 사람들이 꺼리는 판자촌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렸을 적 자신의 경험을 비춰볼 때 지금의 변화를 발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 재개발, 주택 개량, 도시 재생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된다. 문제의 이 지역이 물리적으로 발전되었고 더 높은 사회적 계층의 주민들이 이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문래지역은 복합거주시설의 개발과 투자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발전되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문래동의 공장 노동자들은 아침 7시경에 일을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한 삶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철의 장인들

이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하지만 예술가들의 유입은 골칫거리였다. 2005년 이후로 임대료는 최소한 세 배로 올랐고, 제조업의 이윤이 감소되었다. 예술가들에 대한 적대감은 임대료 인상을 부채질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공장 노동자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방해를 받는다는 불쾌감 때문이었다.

거리연극집단 ‘몸꼴’이 2005년에 문래동으로 이주했을 때 단원들은 공장 기술자들과 협력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들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평생 주 6일 근무를 해 온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예술가들의 불규칙한 생활과 공장 작업에 방해가 되곤 하는 창작활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두 그룹의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통해 노동자들은 예술가들을 게으르고 정신이 나간 인간- 자신들의 핵심적인 가치와 상반되는-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문래지역주민간의 단절로 이르게 된 것이다. 플로리스트 이정주씨는 작년 공장의 화재로 인한 피해보상을 거절당했는데 이는 공장주가 가졌던 예술가들에 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한 불만을 가진 예술가들도 있다.

대림로에 위치한 대안적 음악공간인 성크헬, 아스팔트 바, 일식당 유쇼쿠는 2016년에 문을 연 문래동의 가게들 가운데 일부이다. 이들은 서울의 젊은이들에게 주말의 매력적인 장소가 되었다.

‘앞선테크’의 사장 전 희순씨는 24년 전 이 지역에 입주한 철의 장인이며 현재 지속되고 있는 이웃과의 긴장을 잘 알고 있다. 예술가와 그들의 활동에 대해 기술자들이 가진 오해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문래동으로 온 예술가들의 삶과 경험들은 우리와 매우 달라요… 기술자들은 예술가들과 자신들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거나 혹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죠. 그저 불만스러운 거죠.”

‘앞선테크’의 사장 전 희순씨

작년에 필자가 한 기술자와 소통에 문제를 겪고 있을 때 내게는 나이가 더 많은 남성 지인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이는 그 기술자가 젊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카페와 바인 바이닐 하우스는 2016년에 문을 열었다. 공장건물을 구입한 개발자는 종전의 구조를 완전히 철거하고 철, 유리,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매력적인 건물을 재건축했다. 인근 옥상에서 보면 예전에 주변 공장들과 연결되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 기술자는 여성을 혐오한다기 보다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처음엔 예술가들이, 나중에는 관광객들이 몰려오며 그 사람들의 안정된 삶은 충격을 받았고 그들은 이런 변화를 거스를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점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을 지 몰라도, 철강 산업은 지난 시절의 잔존물이 아닌 것이다. 많은 제조업 종사자들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중국으로 떠났음에도 문래동의 기술자들이 번창했던 이유는 그들의 분야가 대량생산 보다는 리서치와 디자인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문래동에는 1,355명의 기술자들이 아직도 산업부품들을 생산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이제 60대가 된 기술자들의 1세대들의 가족들도 금속노동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손 지혜씨와 그의 남동생은 가족기업인 한국철강에서 매니저와 기술자로 근무 중이다. 그들이 가업을 이는 이유는 30년 동안 쌓인 금속기술과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금속 기술자들의 2세들만이 문래에 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공장주들도 문래동으로 이주하기를 원한다.

9개월 사이의 변화 : 베트남 식당 사이공의 소유주는 옆 공장에게 제안을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을 인수하고 2017년 초에 편의점을 개업했고 (왼쪽), 도림로에 갤러리와 카페를 오픈했다. 하지만 갤러리는 2월에 문을 닫았고 지난 2개월 동안 비어있는 상태다. 2017년 초부터 문래동에서는 업종이 변화하고, 비어있는 가게들이 많은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문래동에 집중된 공장들은 금속공업의 기초가 부족한 이들에게 작업경험과 사업적 연계를 제공하는 완벽한 출발점이 되어준다. 비록 문래동이 바람직한 금속공업지역으로 남아있지만 공장에서 상업공간, 혹은 스튜디오로의 전향이 되돌릴 수 없는 일이므로 젊은 공장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오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공간으로 바뀐 공장들은 다시 금속공장으로 활용될 수가 없는데 이는 공장 전용의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사업을 확장하고자 하는 현존 공장들은 공간이 줄어들고 있는 사실에 타격을 받고 있다. 예술가들이 방해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들의 상이한 생활방식은 문래동 금속노동자들의 사회적, 물리적 지평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금속산업의 조건이 악화되는 것에 기술자들이 분개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으나 그 분노를 예술가들에게 겨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대신에 그들은 현재의 변화에 대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최근에 문래동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올리면서 피해를 본 이들은 문래동 3가의 소규모 철공장들이다. 공간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이 지역은 상업화가 가장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상점/작업실과 공장들의 비율은 약 40대 60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

서울시 정부에서는 저개발 지역 개발에 있어서 사회적 재분배 정책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대규모 재개발 전략을 활용해왔다. 2015년에 서울시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일곱 가지 대책을 시행하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려 노력했으며 소상공인들의 임대료를 올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건물주에게 최대 3천만원의 주택개조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문래동은 이 계획에서 제외되었으며 작년에야 처음으로 네 업소가 정부의 “도시 재활용”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지원금을 받았는데 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는 대책으로써 기존의 인프라구조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장려하는 조치였다.

사회적 기업 안테나의 개방형 사무실 아트x 스테이는 몇 명의 챔피언을 배출했던 30년이 넘는 역사의 권투도장 자리에 문을 열었다. 내부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샌드백들은 입구에 놓여져 있었다. 안테나가 이 샌드백들을 공간의 기억으로 간직할 지 아니면 폐기할지는 미지수이다.

공장소유주와 예술가들이 이 논의에서 제외되었으므로 몇몇 사업자들에게만 돌아간 이 혜택은 의혹을 받았다. 권력관계의 불균등은 한국사회에 만연하고 있으며 이는 문래동 주민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예술가들과 점포, 공장들이 주를 이루는 입주자들과 건물주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경제침체 때문에 세입자들을 쫓아내고 전 월세를 올려 받는 것이 건물주에게는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다. 서울에서는 세입자들의 계약연장기간이 5년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공장들은 (최근에는 예술가들과 소규모 창업자들도) 더 높은 월세를 낼 세입자들에게 밀려났던 것이다.예술가들과 창업자들이 주도하는 지역발전을 장려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지원금이 지급되었던 반면 “도시의 살아있는 경험과 생활공간”으로 공헌했던 공장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불공정한 임대법과 정부의 개발의지를 이용해서 자본가들은 도시공간을 만들어 내는 권력을 손에 쥐었고, 이로써 처음에 문래동을 일궜던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수그러들 줄 모르는 경제적 투자를 부추기는 도시재생이 아니라 차라리 혜택을 못 받는 이들을 위한 임대시장에 평등을 줄 수 있는 사회적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집단의 먼지

새로 입주한 이들이 문래동을 저렴한 임대료의 천국으로 생각하지만 다수는 자신들이 공장들의 생존에 깊이 관여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않다.

문래 캠퍼스 같은 지역 예술가들과 상인들의 연합은 재능교류 수업이나 야시장 같은 행사를 통해 상호 번영을 꾀했다. 회원들은 플로리스트 손민지의 스튜디오에서 만나 다음번 야시장의 운송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공장들은 개발업자들이 제시하는 감질나는 액수의 돈을 거절하고 그 자리를 지키면서 억제되지 않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최전선에서 싸워왔다. 시끄러운 공장들과 먼지 쌓인 거리들 때문에 문래동이 특별한 곳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 없이는 지역에 관한 관심도 사라질 것이고 거리는 텅 비거나 전 주인들의 빈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엔지니어 최재은은 다른 기술자들과는 달리1972년 문래동에 왔다. 그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지역 예술가들과 자주 협력하기도 했다. 그의 공장은 거리 사진의 인기를 끄는 도림로에 위치하고 있다.

대학로나 북촌, 서촌, 가로수길 그리고 종로 같은 지역을 보면 상점가로 변하게 될 문래동의 가능한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의 집주인과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올려서 많은 돈을 벌었고 결국 독특한 지역의 모습은 과도한 상업화를 통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젊은이들은 정체성을 잃은 이런 지역에서 떠나갔다.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낮추기 보단 자신의 공간들을 빈 상태로 방치했기 때문에 이 주변은 황폐해졌다. 낮은 임대료 때문이 아니라 건물주들이 자신의 공간들을 빈 상태로 방치했기 때문에 이 주변은 황폐해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역의 동맥과도 같은 도림로의 공간들은 커져가는 관심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달 동안 빈 채로 방치되었다. 1972년에 이주해 온 기술자 최재은씨는 이런 변화를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게 인생입니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거기 적응해야죠” 그는 문래동의 역사에 대한 작가 한가온 씨와의 인터뷰에서 에게 이렇게 말했다. 1세대 예술가들도 최근에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여파로 임대료가 턱없이 올랐기 때문이다. 상업공간들의 수가 안정되고 나면 더 많은 부유한 세입자들이 몰려들어서 마치 1960년대와 70년대 뉴욕의 소호, 그리고 201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미션과 카스트로 디스트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은 새로운 세입자들만이 견뎌낼 수 있을 곳으로 변할 것이다.

이승혁은 어반아트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자 한국의 가장 잘 알려진 메탈음악 소개하는 문래 메탈 뮤직의 기획자이다. 그와 보노보씨의 이소주씨는 이 지역을 재생하려는 서울시 정부와 많은 협력을 해왔다.

문래동의 유일한 게스트하우스인 어반 아트 게스트하우스는 올해 5년 임대계약기간의 마지막 해를 맞는데 건물의 새 주인은 임대료를 세 배로 올릴 계획을 알려왔다. 임대시장의 움직임을 보며 게스트하우스 주인 이승혁씨는 계속 머물러야 할 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이미 존재하는 것과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투쟁이다.

완벽한 해법은 없지만 중간소득층 대상의 영역설치, 혹은 임대료 동결 등의 조치를 통해서 구조적인 불의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문래동을 순전히 철강노동자들의 구역으로 제한하자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 지역에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역사적으로 엮인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재산권이 부유층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컨퍼런스나 비즈니스 연합 같은 풀뿌리 행위들은 직업적 분리화속에서 비효과적으로 지속되어왔지만 박근혜 정부의 퇴진으로 이 지역에는 진정한 공동의 행동이 대중을 위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많은 희망이 생겨났다. 협력을 통해서 정부가 금속공장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보호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이다.

문래의 예술가와 기술자의 과거는 갈등으로 물들여있지만 그들이 함께 가꾼 문래에 남아있으려면 화합과 협력이 필요하다. 개인으로는 힘이 없지만 함께 하면 과거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미래와도 공존할 수 있는 앞날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글에 도움을 주신 다음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좌측 상단으로부터: 송기연과 종명섭, 한가옥, 박지원, 이완, 케이채, 박주운, 임현진, Jin Meyerson

케이채 (사진공간 빛타래), 최순아 (서울산책), 한가옥 (문래동 철부지), 한중희 (문래예술공장), 전희순(앞선테크), 종명섭 (사진문화공간 아지트), 김준형 (보노보C), 김순미 (숲), 이효주 ( 티모르 커피공방), 이승혁 (어반아트), 이완 (예술가), Jin Meyerson (예술가), 오상록 (밀면땡기리), 박지훈 (예술가), 박지원 (대안예술공간이포, 기술과 예술의 마을 공동체), 박주원 (예술가), 박주운 (우쿨렐레 파크), 송기연 (사진문화공간 아지트), 손지혜 (한국철강), 예병현 (사진작가), 염동연 (Bones & Pieces)

문래동, 05/2017

번역 이대일, 편집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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