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객관을 지향하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쓴 글이 늘 옳을 수는 없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카는 그 유명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는 말을 남겼다. 6차 교육과정을 거친 지금의 30대라면 들어본 적 있는 문장일 것이다. 누구나 이 책을 조금만 더 읽다보면 깨닫는 게 하나 있는데, 번역이 참 개떡같다는 것(…)이다.

여튼, 내용을 꾸역꾸역 읽다보면 저자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뭔지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인데, 바로 ‘객관’과 ‘주관’에 대한 이야기다. 카는 모든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있어서 ‘객관’이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기성 학계의 역사적 서술에 대한 방법론에는 틈새가 있고, 심지어 역사를 서술하는 이 역시 그 시대적인 관점에서 기록을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가 예로 들었던 독일 역사가 마이네케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격동기의 역사가들 중에는 그 저작 속에 하나의 사회 질서가 아닌 갖가지 질서의 계기를 반영시킨 사람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예로는 독일의 위대한 역사가 마이네케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3명의 마이네케를 보게 되며, 그 각자가 서로 다른 역사적 시대의 대변인 구실을 함과 동시에 제각기 그의 3대 저작 중의 하나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907년 발행된 ‘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의 마이네케는 비스마르크 제국을 독일의 민족적 이상이 실현된 것으로 확신하며, 민족주의를 보편주의의 최상의 형태와 동일시켰다. 1925년 출판한 ‘국가적 이성의 관념’에서의 마이네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분열되고 당황한 정신상태를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나치의 지배 속에서 학문적 영예를 상실한 1936년 출간된 ‘역사주의의 성립’을 통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역사주의를 배격하고, 줄안한 상태로 동요하며 절망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그러다가 노년의 마이네케는 ‘독일의 파국’이라는 저서를 통해 역사란 맹목적이고 가차없는 우연이 좌우된다는 신앙에 맥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 역사란 무엇인가 中
E.H.Carr

기록, 글, 담론을 만들어내는 이는 주관적 관점에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게 그 시대의 세계관이든, 혹은 주관적인 신념이든 무엇이든지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객관적인 근거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지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부분을 보고 유추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조각들을 조합하는 일일 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기자로 보내면서 끊임없이 훈련했던 것이기도 하다. 팩트에 근거한 글을 쓰는 것. 그리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이끌어내면 좋은 글이란 평가를 받는 구조. 그것의 반복.

나는 여전히 계속해서 글을 쓰지만, 쓸 때마다 아득할 적이 많다. 나는 어디까지를 보고 쓰는 것일까. 내가 조합하는 부분들이 전체를 왜곡하지는 않는 걸까 등등. 과거의 쓴 기사들, 글들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많다. 확신을 갖고 썼던 것들이 시간이 지난 후 틀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쓴 글이 늘 옳을 수는 없으나, 내 관점을 놓고 여러가지 생각이 오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마윈이 했던 말이다. ‘我讲的不一定是对的,但是我希望我讲的给大家一点思考(제 강의가 무조건 옳진 않겠지만, 여러분들이 이를 통해 생각을 한 번 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확신을 갖고 글을 쓰지 않는다. 그저 수많은 관점 중에 시장과 업계에 의미가 있을 만한 내용을 추려서 올리고 평가받을 뿐이다. 나 역시 객관을 추구하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종종 소셜에서 확신에 찬, 그리고 분명한 글들을 볼 때면 의도가 읽히곤 한다. 이익이 얽혀 있는 상황, 확실한 신념, 팬을 모으기 위한 것 등등. 명확한 색깔만큼이나 목적 역시 분명하다. 합리보다는 콘텐츠가 이끄는 영향력이 더 중요해보인다. 지금 시대의 한 단면이다.

중국 지식교양 분야의 최고로 꼽히는 뤄전위(罗振宇)는 이 시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나 역시 이렇게 살기 위해 매일을 몸부림칠 따름이다.

“저는 40여년을 살아오면서 관찰자로서 두 종류의 사람을 봤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입장’ ‘용납’ ‘의견’으로만 점철된 사람이 있으며, ‘목표’ ‘방법’ ‘행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입장, 의견, 용납의 패러다임에선 각종 지식과 가치관들이 다툼을 벌입니다. 어느 부분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했죠. 생각해보면 이것도 맞고, 저것도 옳은 것 같았습니다. 왜일까요. 이 세상은 극렬하게 나뉘어있기 때문입니다. 의견이란 것은 확정된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후자의 삶을 살게 된 이후 모든 것이 융합됐습니다.” – [논리사유] 이 시대의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