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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모비인사이드


기자에서 피자로 돌아선 지 9개월이란 시간이 지났다. 피자가 뭔고 하니.

피알+기자=피자(…)

특별한 호칭을 사용하면 좋겠다는 신동형 게임덕 대표의 조언에 따라, 마음 속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아재’를 최대한 끌어내 만든 키워드였다.

2010년 머니투데이 인터넷이슈팀에서 첫 기자 생활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글을 못쓴다는 이유로 1달 만에 쫓겨났(…)다. 그렇게 기자의 꿈을 버리고 9급 공무원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그해 12월, 우연찮은 기회로 프리랜서의 삶을 시작했다. 1년간 이데일리TV에서 월급 36만원부터 시작해 조연출, 작가, 리포터를 가리지 않았던 시절이다. 박봉, 직업적 안정성 빼고는 정말 재미있게 일했던 시절이었던듯 하다.

이후 2012년 4월부터 아시아투데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2013년 10월 한국 IT 잡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마이크로소프트웨어로 이직해 전문 기자의 삶을 꿈꿨으나 회사가 망했다.

이제 기자 안해!

다짐 후 본격 이직을 준비했고, 모바일 마케팅 회사인 모비데이즈로 옮기게 됐다. 그때 슬로우뉴스의 진혁님과 인터뷰를 하며 “기자를 때려친다”고 했었는데…

MC 유재석과 이름이 같아 검색이 안 되는 비운의 기자 유재석(왼쪽). (출처: 위키백과 공용, 슬로우뉴스 기사 중)
MC 유재석과 이름이 같아 검색이 안 되는 비운의 기자 유재석(왼쪽). (출처: 위키백과 공용, 슬로우뉴스 기사 중)

막상 와보니 기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2015년 10월 1일 뉴미디어 플랫폼인 모비인사이드를 창간했고, 70여편의 칼럼을 써왔다. 최강 디자인팀의 능력을 빌려 기억에 남을 법한 인포그래픽들도 만들어왔다.

한국 O2O의 모든 것
한국 O2O의 모든 것. designed by 임원, 이수미 매니저

9개월. 모비인사이드에서의 도전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으려고 한다. 옆에 아이는 자고, 할 일은 많지만 도무지 의지가 없어 짬을 내 자가 인터뷰를 시작한다.

Q. 왜 떠나는가?

A. 내 할 일이 끝났다.

Q. 응?

A. 마소(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그만두고 모비데이즈에 합류하면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플랫폼 구축’이었다. 당시 모비인사이드라는 뉴미디어플랫폼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업계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차적 역할이었다.

Q. 그래서?

A. 했다. 열심히. 10월 1일 창간한 뒤 7개월 만에 페이스북 좋아요 숫자는 5000, 콘텐츠 좋아요, 댓글, 공유 주간 총합은 1000에서 2000을 넘나들었다. 도달 수치로는 10만에서 15만. 그래도 동종업계에서 모비인사이드가 뭐하는 곳인지는 알렸던 것 같다.(맞..맞죠?)

Q. 떠나게 된 이유를 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A. 기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었다. 나중에 다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마소에서 기자하던 시절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기자수첩 성격 및 예측성(이라 쓰고 무리수라 읽는다?) 칼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주에 1개의 포스팅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다가 어언 1일 1개로 확대하게 됐다. 어느 순간 페이지뷰(PV) 기준 내가 쓴 기사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마소가 망했(…)다. 다음 직장을 고민하던 와중 모비데이즈의 유범령 대표를 몇차례 만나게 됐고, 나름 계획했던 스텝과 절충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 줄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기자라는 이름을 쓰진 않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역할’

모비인사이드는 예상보다 빠르게 시장에 자리잡았다. PV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칼럼당 최소 2000뷰, 최대 2만~3만뷰. 좋아요를 기준으로는 최소 100개, 최대 2000~3000개는 나왔다. 굳이 네이버나 다음 등 포털에 노출되지 않아도 페이스북에서 나름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모비인사이드가 자리를 잡으면 잡을수록, ‘전문성’에 대한 괴리감은 더욱 커져갔다.

모비로 와서 00매체 기자 유재석 대신 유재석 자체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참 감사한 일이지만, 여전히 전문성은 없었다. 트렌드를 얕게 비틀어서 쓰는 정도였을 뿐. 좋아요라는 인기에 취해서 살 수 있겠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나와 독자 모두에게 안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박수 칠 때 떠나고 싶기도 했고.

Q. 뭐 먹고 살 것인가?

A. 다음 직장을 물어보는 것인가? 답은 지난 슬로우뉴스 인터뷰에 있다.

모비데이즈는 글로벌 시장 진출을 목표로 한 회사다. 회사 인원 절반이 한국어보다는 영어, 중국어가 편하다고 하더라. 중국 시장을 배울 기회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중국 모바일 광고 관련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모비데이즈에서 끝내 하지 못했던 ‘중국’이란 키워드를 본격 살릴 것이다. 더 이상 콘텐츠 크리에이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무를 할 것이다.

Q.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A. 아직, 비밀(^^) 담 주에 말씀드리겠다. 중국, IT, 이커머스란 키워드가 모두 겹치는 곳이다.

Q. 글은 안쓰나

A. 쓴다. 예전만큼 활발하게 하루에 한개씩 쏟아내지는 못하겠지만, 대신 더 깊은 차원에서의 콘텐츠를 만들 계획이다. 모비데이즈를 그만두기는 하지만 모비인사이드는 객원 파트너로 계속 함께 할 계획. 이밖에 각종 매체에 꾸준히 글을 기고할 것이다.

Q. 좀 쉽게 살면 안되나?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A. 100세 시대라고들 한다. 공무원, 공기업 소속 직원이라고 할지라도 60세에 퇴직한다. 민간기업은 더 할 말이 없다. 자녀 대학 학자금 수혜를 입는 직원이 손꼽힐 정도니.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은 두 가지 정도다. 연금으로 버티든가, 모은 돈으로 치킨집이든 커피집이든 창업을 하든가. 둘 다 쉽지 않다. 연금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창업은 5%만이 3년 뒤 생존하는 수준이다.

암울한가? 12년 전, 편하디 편한 대학생 새내기 시절부터 나를 짓눌러왔던 미래다. 고민에 그칠 수 없었다. 나름의 대안을 내렸는데, 해당 업계 전문가가 되면 지속적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군대를 제대하니 내 전공, 국사학이 한스럽더라.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능을 다시 볼까 하다가, 그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단 생각에 중국으로 도망쳤다.

Q. 중국?

A. 그렇다. 중국에서 1년 간 구른 다음에 KFC에서 알바를 하든, 과외를 하든 중국에 붙어있자는 계획으로 도피성 유학을 갔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귀국했지만 말이다. 2010년 4학년 2학기. 한국에 돌아와서 전문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직군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트위터를 발견했다.

당시 트위터가 지금의 페이스북만큼 엄청 유명했는데, 소위 영향력 있는 네임드의 많은 숫자가 언론인이었다. ’00일보, 00방송사에서 일합니다’는 프로필 한 줄이 어찌 부럽던지. 그래서 기자를 준비했고, 지난 4~5년간 소정의 목표한 바를 이뤄왔다. 이제는 다음 스텝인 중국이란 키워드에 본격 뛰어들게 됐다. 중국, IT, 커머스. 3개의 키워드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이 추상적이나 꼭 달성할 목표다.

Q. 끝으로 할 말이 있다면

A. 늘, 다시 시작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몇번 얘기한 적 있지만 처음 아시아투데이를 그만두고 마소에 간다고 했을 때 데스크부터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잡지사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고 했다. 그때 나는 ‘어차피 잃을 게 없다’고 답했다. 마소를 그만두고 모비에 갈 때도 ‘기자 타이틀 내려놓으면 누구도 정보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어차피 잃을 게 없다’고 했다.

잃을 게 없기에 두려울 게 없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전문성’과 ‘콘텐츠’ 두 가지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잘 부탁드린다.

ps. 마지막으로 매년 급변하는 나를 잘 참아주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