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들어간다고 해도 잘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막상 들어간다고 해도 잘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 고민하지 않는 듯하다.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언제나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점수 맞춰서 대학 가기라는 전략이 주로 널리 쓰인다.’ (출처 Romantic Binaries)
(부모님 덕분에 배부른 고민을 했었던 것이지만) 내가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보내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 중에 하나는 ‘현재로서는 박사를 하지 않겠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된 점이다. 특별한 목적 의식이나 동기부여 없이 너무 당연하게 학사를 마치면 석사를 하고, 석사를 마치면 박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20대 중반까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가지고 있던 나에게 4.0은 커녕 3.0도 힘겨웠던 내 학점은 스스로를 커다란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공부에 소질은 없는 것 같은데,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리서치 정도는 해봐야 할 것 같았고, 그래야 전문성이라는 녀석에 눈꼽만큼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학부부터 성적이 개판인 나는 석사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을 뿐더러, (듣기로는) 대학원 학점은 누구나 거의 만점을 받는다는 소리는 (솔직히 안 그럴꺼 다 안다…) 내게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석사에서의 연구는 학부에서의 수업과 달라서 학부에서 별로 였어도 석사 과정이 재밌거나 맞을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언들도 있었고, 막연한 유학과 학위에 대한 로망(?)을 좇아 유학을 준비했고, 그 커다란 경제적인 (등골브레이커!!!) 투자와 시간적인 투자를 등에 업고, ‘미국에서 미리 석사 때 승부를 해볼 수 있고, 더 좋은 박사 과정으로 진학 할 가능성이 높다’ 라는 스스로도 확신 할 수 없는 논리로 부모님을 설득해서 진학을 했었다.
막상 진학한 석사는 논문을 쓰지 않고 수업을 많이 듣는 프로페셔널 석사과정. 그래도 박사를 염두에 두고 왔던지라 첫 학기에 교수님들 모두에게 일일히 레쥬메를 첨부해 메일을 보내고, 연구에 관심이 있다고도 하고, Independent Study 를 하기 위해 나를 지도해줄 교수님을 찾기 위해 학과의 대부분의 교수님께 메일을 돌리고 인터뷰를 받고 했다. 운이 좋게도 당시에 학장이셨던 교수님께서 나를 1:1로 면담을 해주시고는 본인도 인도 출신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처음에 힘들었는데, 하나 둘 열심히 쫓아가고 노력하면 된다고, 본인의 경험담과 함께 공부 + 영어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강조하시면서 직접 연구하시던 프로젝트에 나를 데려가셨고, 운이 좋게도 석사 과정을 통틀어 제일 친한 친구와 둘이 함께 해당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었다.
석사 과정에서 내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연구에 대한 경험도, 티칭에 대한 경험도, 심지어 논문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박사 과정 지원시에 얼마나 안 좋을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RA 자리도 동시에 찾았었는데, 이 역시 운 좋게도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던 privacy 분야의 교수님께 픽업이 되어 연구도 돕게 되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뭔가 열심히 하는 아시안 학생에게 ‘길’이 열리는 스토리 중에 일부 같으나… 나는 이 기회들을 살리지 못했다. 이 분들 아래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일하면서, ‘연구’ 란 무엇인지, 아니, 그보다는 논문 하나라도 제대로 읽어보고, outstanding 한 학생이 되어서 이 분들께 박사과정으로 가는 추천서를 받아내자!! 가 목표였는데 … 개뿔. 개판이었다. 주어진 일도 있었으나 내가 알아서 찾아서 제안하고 토론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나가야 되었는데, 전혀 그렇지 못 했다. 주는 일만 간신히 처리하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는 커녕 그냥 B급 학생 정도의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여기서 사실 한번 크게 좌절했다. ‘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인가.’
부모님께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박사 과정에 진학해보겠다고 큰소리치고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왔는데, 내 생각보다 내가 열심히 못? 안? 하는 것이다. 결과도 당연히 신통치 않고. 첫 학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를 두가지나 연타로 잡았는데, 둘 다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고 나니 답답했다. 나는 뭐지? 뭘 어떻게 해야하지? 나 바보인가?
한 학기를 그렇게 보내고, 두번째 학기의 절반쯤 보냈을 때 나 스스로에 대한 결론이 나왔다. ‘아, 박사과정은 나에게 맞는 선택이 아니구나.’ 나한테 맞는 선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박사는 아니구나. 그러면서 했던 생각이 딱 저 문장이었다.
“내가 지원한다고 박사 어드미션이 나오지도 않겠지만, 막상 나오면 더 큰일이겠구나.”
라는. 박사과정에 지원해서 떨어지는 상황보다, 붙는 상황이 나에게 훨씬 큰 악몽으로 다가오자 선택이 명확해졌다. 어떻게든 박사는 가면 안 되겠구나. 근데,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하지? “엄마 나 공부해보니까. 안될 것 같아.” 이렇게? 기둥뿌리 뽑아서 유학가놓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미래를 내다보고 선택한 전공이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행운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는 부분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외국인이 미국에서 석사를 받은 뒤, 취업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전공이 내 전공이었다는 것. 아마, 미국에서 취업이 어려운 전공이었으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고민의 과정과 험난한 현실을 더 거쳤을 것 같다.)
그리고 두번째 학기 말 무렵에, 대학원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성적을 받았었다. 한 과목을 완전히 망치고 집에서 좌절하고 혼자 벽에 머리를 (문자 그대로, 벽에 머리를 쿵쿵) 몇번 박으면서 좌절하고, 이불에 발차기를 하면서 혼돈으로 밤을 보냈다. 한 이틀 지나서 ‘아니야! 그래도 이제부터 더 잘하면 돼!!’ 라고 간신히 멘탈이 회복될 찰나, 다른 하나의 과목에서 그 상상하기 어려운 성적이 하나 더 나와버렸다. 이때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박사는 안+못 가는 상황이지, 취업이 될지도 모르겠지, 그보다는 (누구도 내게 뭐라하지 않지만) 스스로 이런 큰 경제적인 투자를 포함한 결정을 내리고 왔는데 그 결정이 ‘실패’ 라고 (실패의 정의가 무엇인지도 불명확했지만) 느끼는 상황. 스물 아홉 먹은 남자 사람이 혼자 집에서 울었다. 엉엉 소리내서 울지도 못하고, 막연한 공포심에 혼자 침대에 누워 이불을 껴안고 울었다. 아… 내가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감당 할 수 없는 녀석을 욕심내다가 이렇게 상황을 힘들게 만들었을까… 하고. 유학와서 참 힘든 점 중에 하나인데, 아무리 큰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있어도 털어놓을 수 있으면 조금 나아지는데, 자괴감의 수치가 어느 한계를 넘어버린 시점이라 털어놓기도 어려워서 안 좋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불어났었다. 불과 하루? 이틀만에.
다시 한번 그때의 운이 좋았던건, 당시에 함께 공부하던 분들이 하나 같이 너무 좋고 고마운 분들이셨다는 점이다. 유학생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부담감과 두려움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나로 하여금 털어놓을 수 있게 해주는 형, 누나, 친구들이 같이 공부를 하고 있었어서 저 위기를 ‘큰 탈 없이’ 넘기고, 그래도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저 당시 내가 느끼던 공포의 크기는 음, (내 멘탈이 유리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당시에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친한 친구한테 나 지금 혼자 있기가 무섭다고 같이 있어달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나 스물아홉 남자사람이었고.
이야기가 (언제나처럼) 매우 길어졌는데, 결국 박사를 안 가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사과정이 나한테 안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결정적인 경험이 하나 더 있다면, 당시에 함께 공부하던 (이라고 쓰고 형들 공부하는 자리 옆에 스스슥가서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고 읽는) 박사형들이었는데, 두 분 모두 박사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박사과정은 인생에서 5년 이상을 쏟아야 하는 짧지 않은 중요한 여정인데, 그 일이 힘들지언정 괴로운 일이 되면 안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를 두 분이 너무 잘 보여주셨다. ‘머리가 똑똑한데, 꾸준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 즐기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박사과정이고, 그 모습을 보면서 옆에 앉아서 공부하다보니 아 난 이 분들처럼 즐길 수는 없을 것 같다, 혹은 아직 그렇게 나를 설레이게 하는 공부를 못 찾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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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위 블로그의 원문 포스팅으로 돌아가,
“사람의 재능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법하다. 하나는 어떤 특수한 분야에만 유용하고, 다른 분야에는 그리 유용하지 않은 특수한 재능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분야를 하건 대체로 다 도움이 될만한 일반적인 재능이다. 가령 끈기나, 체력, 이해력 등은 일반적인 재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특수한 재능은 어느 정도 지니고 태어나지만, 일반 재능은 좀더 귀한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걸 풀어서 얘기하면, 어떤 전공을 선택하더라도 어떻게든 잘 해낼 수 있는 재능은 흔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내게 그러한 일반 재능이 풍부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높은 베팅이다.”
라는 이야기도 참 공감되고, 나에게는 신선한 정리인 것 같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은 별로라고 하는데도 나한테는 즐거운 것에 주목할 필요” 가 있다는 것까지.
내가 유학을 준비하는 분들께 말씀드리는 ‘왜’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 ‘죽을 고생’ 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상당 부분 내 경험을 바탕으로 들려드리는 조언이다. 내가 딱 그랬는데, 다른 분들은 제발 이러시지 않기를 바라기에. 나는 그저 운이 좋았는데, 누구나, 언제나 운이 좋을수는 없을 것이고, 그런 경우가 끔찍해 질 수도 있기에.
여튼, 내가 생각하던 그 표현을 딱 만나서 반가웠다 — “막상 들어간다고 해도 잘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