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데이비슨은 내 꿈의 모터사이클이었다

꿈의 기원

김대현
AJ Safe Riding
10 min readAug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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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얘기하면 나이가 드러나서 뻘쭘하니, 중학생 시절쯤이라고 하자. 초등학교 일 수도 있고, 고등학교일 수도 있다. 그때쯤, 시대의 SF 대작,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을 완전히 빠져들어 봤었다. 없는 용돈 박박 긁어서 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던가? 여러 장면 중에도, 아놀드 형님이 어린 존 코너를 구하러 등장해, 모터사이클 측면에 달아놓은 산탄총을 꺼내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손 리로딩 기술을 선보이며 날아서 내려왔던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이미지 출처] http://saxfacts.tumblr.com/post/99245665696/a-functionalist-approach-affirming-identity-and

영화의 재미나 시대를 앞선 화려한 CG 등 모든 것이, 어린 나를 여러모로 압도하기 충분했지만, 그중에서도 그 오도바이의 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 커다란 모터사이클은 알게 모르게 내 꿈의 하나가 되었다.

또 다른 지름신

그 후로 시간이 흘러 두 대의 125cc 기종을 거쳐, 2종소형 면허를 딴 뒤에는 첫 미들급 바이크로 국산 이륜차의 자존심인 코멧650을 탔다. 네이키드 바이크로 도심을 달리기에도 좋고, 79마력의 힘으로 달리기 좋은 도로를 신나게 쏘기도 출력이 충분했다.

[이미지출처] http://www.motorcyclenews.com/bike-reviews/hyosung/gt650-comet/2004/

그러다 도심 어딘가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할리데이비슨 한 대가 다가와 섰다. 사실 옆에 오기 전부터 할리데이비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소리가 잘 말해주니까. 옆에서 보니, 그 중 아담한 스포스터 883 모델이었고, 캬브레이터 모델이었는지 할리데이비슨 특유의 중후한 말발굽 소리 배기음이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신호가 바뀌자, 나보다 먼저 휙 하니 치고 나갔다. 너무 부러웠던지 질투가 났던지, 아무튼 곧바로 쫓아서 풀 스로틀을 당겼다. 처음엔 좀 치고 나가던 그 할리는 조금 속도가 빨라지다 너무도 (상대적으로) 힘없이 천천히 달리고 있었고, 내 바이크가 그 할리를 너무 싱겁게 제치고 앞서 지나가 버렸다.

그 할리 라이더는 아마도 신경 쓰지도 않았을 속도 경쟁에서는 나 혼자 이겼지만, 난 이미 그 꿈의 바이크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패배한 것이었다.

드디어 할리데이비슨 라이더가 되고

미들급 네이키드 바이크로도 빠른 속도가 안겨주는 흥분과 긴장감을 종종 즐겼지만, 그 이면에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함께 들곤 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좀 무섭지만, 어쩌면 바이크 사고로 죽으면 오히려 깔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사고가 크게 나면, 살더라도 너무 크게 다쳐서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정말 힘들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몇 년간 직장 생활을 하고 나니, 할리데이비슨을 살 수 있는 돈이 모였다. 주변 친구들이 차를 살까 말까 고민할 때 즈음, 나는 차에는 관심이 없었고, 준중형 자동차 가격과 비슷한 바이크를 사게 된 것이지. 그래도 할리데이비슨은 빠른 속도를 즐기는 바이크는 아니니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선택한 것은 할리데이비슨의 입문 기종인 스포스터였고, 그 중에서도 883 로드스터 오렌지색. 할리데이비슨 치고는 가벼운 무게와 높은 시트고와 얄쌍한 차체로 도심 주행에도 좋다. 아쉽게도 이 때부터는 모든 모델이 인젝션 방식으로 바뀌어서, 캬브레터 방식에서 들을 수 있던 말발굽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됐지만, 어쨌건, 오랜 시간 속에 담겨있던 꿈을 이루게 된 것.

[이미지출처] http://www.harley-davidson.com/

한동안 꿈의 바이크를 타게 된 것에 감사하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지냈다. 주중에는 883R로 출퇴근도 하고, 주말이면 근교로 라이딩을 나가고, 재밌고 뿌듯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째, 883급으로는 다른 빅트윈(1,500cc 이상) 할리데이비슨의 중후한 사운드가 나지 않았다. 혼자 도로를 누빌 때야 스스로 웅장한 배기음을 즐기며 달렸으나, 도로에서 다른 빅트윈 할리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야 나누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는 느낌이 들어서, 업그레이드 욕심이 생겼다. 그놈의 상대적 비교가 문제이다.

과연 그렇게 오랜 기간 “꿈”이라 여기며 갈망했을 가치가 있는 도전적인 일이었나?

둘째, 이게 과연 그렇게 오랜 기간 “꿈”이라 여기며 갈망했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도전적인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적지 않은 큰돈이 필요하지만, 차를 살만한 경제력이 갖춘 사람이라면, 차 대신 바이크를 사면 되는 일이다. 차가 필수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 나잇대의 미혼 남성이 대중교통 잘 발달해 있는 서울에서 차 없이 지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꿈이라 여기고, 그 꿈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목표로 보였지만, 막상 실현되고 나니 별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고 느껴졌다.

응? 이걸 그렇게 오래 원했었어? 그냥 사면 되는 건데?

대부분 꿈이 원래 이루고 나면 별것 아닌 걸지 모르겠지만, 돈이 있으면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은 성취감이 크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긴 하지만, 돈만 있으면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대한 의구심이 든 것.

아무튼, 어느덧 꿈이었던 할리데이비슨은 이미 당연한 것이 되었고, 그 큰 즐거움은 원래의 기대보다는 적었지만, 그래도 꽤 만족스럽게 몇 년 잘 타고 다녔다. 883R을 타는 동안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훗!

결국 빅트윈 엔진의 할리데이비슨을 사다

어쩌면 두 번째 문제가 본질이었을 텐데, 애써 눈을 가리고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해보기로 한다. 883R을 판매하고, 그 위 등급인 Dyna 모델로 업그레이드했다. 그 기변의 합리화로 꼽을 만한 것 중 가장 큰 이유는,

“아내와 함께 타기에 엔진 출력이 달린다.”

였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며, 할리데이비슨 다이나 스트릿밥(Dyna Streetbob)이라는 모델을 샀고, 기대만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잘 타고 다녔다. 아내도 종종 원래의 오렌지색 오토바이가 마음에 들었고 타기도 좋았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이 커다란 할리데이비슨은 무언가 편안하지 않았고, 어차피 당분간은 바이크를 “관리하며” 타기에는 힘들다는 판단에, 헐값에 처분하고 말았다.

입양 보내기 직전 마지막 사진

내 소유였던 스트리트밥을 새 주인이 타고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역시 배기음이 참 중후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래 저 소리의 맛으로 저 바이크를 즐겨 탔었지”라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왜 할리를 팔았을까?

카페에 일하러 갔다가, OSX 업데이트로 맥북을 잠시 쓸 수 없는 동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앞에 여행온 커플의 모습이 참 다정해 보여서 일부러 한 샷에 담았다)

전혀 상관없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

우리 가족도 여름이 되면 바닷가에서 자주 시간을 보낸다. 몇 년전, 해안에 작은 보트를 정박해놓고 있던 우리 앞에 거대한 요트 한 대가 보란 듯이 천천히 지나갔다. 당시 각각 다섯 살, 일곱 살이었던 아이들은 그 거대한 요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외용 탁자와 의자가 구비된 테라스, 헤엄을 칠 때 이용하는 작은 사다리, 플렉시 유리 앞에 달려 있는 와이퍼, 그리고 요트의 천장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환풍기. (그 환풍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이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반짝이는 날개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오, 아빠, 아빠! 우리도 저런 배 사면 안 돼요?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저런 배는 매우 비실용적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얕은 곳에서는 방향을 돌리거나 정박을 하지도 못하고, 손잡이와 유리창에 반짝반짝하게 광을 내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요트 안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도 만만찮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요트를 닦고 정리하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걸 생각해보렴! 그건 그렇고, 저 요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고 장담할 수도 없잖아? 틀림없이 우리보다 즐겁게 휴가를 보내진 못할 거야. 왜냐하면 요트가 어디에 긁힐까 봐 시도 때도 없이 걱정을 해야 하고, 기름은 충분한지, 또 전구에 불은 켜져 있는지, 화장실은 제대로 작동을 하는지 등등 수백 가지 걱정거리로 머리가 아플 게 분명하니까. 더구나 헤엄을 치고 싶을 때 수온이 적당한지 알아보려면 들락날락하면서 수온을 측정해봐야 하니까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잖아? 아이들은 내 말의 요점을 즉각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저런 요트를 사려면 수천만 원이 든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 “만약 우리가 천국에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토마스 휠란 에릭센저, 손화수 옮김, 54p

그래, 아마도 내게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은, 저자와 아이들에게 비친 화려한 요트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은 이런저런 관리를 해주어야 하는데, 난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은 좋아했지만 관리하는 것은 너무도 번거로워했다. 세차도 자주 하고 왁스 칠도 열심히 해야 하건만, 그만한 정성이 없는 게으른 라이더였다. 워낙 크롬 파츠가 많은 데다, 소리며 외양이 주변 이목을 끄는 편인데, 난 그런 이목도 불편해하는 내향적 성격이고, 또 주변 이목이 끌렸는데, 바이크 상태가 깨끗지 않아서 또 한 번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또, 사실 덩치 큰 모터사이클은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레저스포츠용이다. 게다가, 할리는 기종 특성상 연비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 모터사이클인데, 난 소심하게도 기름값이 신경쓰였다. 빅트윈 할리데이비슨은 우리 가족이 타는 준중형 디젤차보다 기름을 많이 먹었다. 휘발유는 경유보다 비싼 데다 연비도 나쁘니, 기름값만 치자면 거의 두 배쯤? 요새는 레저를 즐길만한 상황은 아니고, 그저 편리한 교통수단으로써 잠깐의 상쾌한 라이딩도 즐길 수 있으면 되는 정도이니, 대형 모터사이클은 이제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사실, 할리데이비슨의 다양한 매력 중 화려한 외양과 멋진 배기음으로 주변의 이목을 끄는 점이 큰 비중을 차지할 테고, 연비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모델이니, 그 두 가지 이유 모두 단점이라고 지적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크다. 단지, 내 성향과 요새의 실용적 필요에 잘 맞지 않게 상황이 달라진 것뿐이다.

그래도, 할리는 내게 하나의 꿈을 이룬 소중한 경험을 해 준 모터사이클이고, 여전히 그 배기음은 너무도 매력적이기에 언젠가 다시 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모르지, 다이나 계열이 아니라, 그보다 위 등급의 소프테일이나 투어링 모델을 타게 되면 그 사소한 불편들이 다 사라질지도 모르지 않나? 아니면, 크기는 내 체구에 맞고, 883보다는 출력이 나은 1,200cc 스포스터가 맞으려나? 훗!

그렇게 돌아서 이제는 소형 모터사이클로

이뤘던 할리데이비슨의 꿈은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됐고, 편리한 교통수단으로써의 라이딩을 다시 시작했다. 125cc의 미니 바이크를 사서 할리를 떠나보낸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 턱없이 부족한 힘과 들리지도 않는 배기음을 내는 모터사이클이지만, 실용적이고 아무런 부담 없이 타고 다니기 좋다.

얼마 가지 않고 다시 중대형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의 상황에 잘 맞는 이 모델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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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마무리

이 편협한 경험으로 배운 점을 섣불리 말해도 된다면, 바랐던 꿈과 경험의 행복은 다를 수 있다고 하겠다. 아니면 이렇게도 달리 말할 수 있겠다. 이룬 꿈은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거기에 머물지 말고 또 다른 꿈을 찾아보라고. 너무 과하게 거창했나? ㅎㅎㅎ

거창함은 빼고, 짧게 다시 정리해보자. 할리데이비슨은 내가 타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멋있는 모터사이클이었다. 내가 그만큼 멋있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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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AJ Safe Riding

시니어 백엔드 개발자. 함수형 프로그래밍을 선망하며 클로저, 스칼라, 하스켈로 도전하며 만족 중. 마이너리티 언어만 쫓아다니면서도 다행히 잘 먹고 산다. 최근엔 러스트로 프로그래머 인생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