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의식과 오브제

도시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라 불리는 물체, 물질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점에 대해서 아브라함 크루즈 비예가스(Abraham-cruzvillegas)와 유지 아게마쑤(Yuji Agematsu)의 관점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도시나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거리에서 물건들을 주워모은다. 물건들이란 버려진 것, 망가진 것, 더럽고 더러는 썩은 것들이다. 우리가 그저 ‘쓰레기’라고 명명하는 것들이 대부분, 온전한 것들은 찾아보기 힘든것들을 수집한다.

크루즈 비예가스의 배경

1960년대 중반. 많은 멕시코 사람들이 멕시코의 시골과 남쪽지방으로부터 수도(멕시코시티)로 이주해왔다. 이들은 바로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의 부모가 속하는 세대이다. 크루즈비예가스는(b.1968) 빈민가정에서 자랐다. 비예가스의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은 거주할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텅빈 땅, 화산바위가 가득한 곳에 정착하기로 한다. 누구도 살기 어려운 그 곳에서 이주자들은 가능한 모든 물품과 재료들을 끌어 모아 살기 위해 새로운 마을을 조금씩 만들어갔다. 이렇게 멕시코 수도의 남쪽에 위치한 아후스코라는 도시가 생겨났다.

자가구축: 앙헬레스 푸엔테스와 로헬리오 크루스비예가스의 대화 Autoconstrucción: A Dialogue Among Ángeles Fuentes and Rogelio Cruzvillegas, 아트 선재, 2015, 서울

노동 치르기

비예가스의 작품은 그의 배경이 말해주듯 황막한 지역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옮긴 초기 이주자들의 삶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불모지 개발의 삶, 그것이 몹시 불안정한 정착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이주자들이 강인하고 유연한 정신을 보여주듯, 작가는 여러 오브제들을 불합리하면서도 유연하게 조합하고 배열한다. 2007년 <자가 건축(오토컨스트럭시옹Auto-construcción)>시리즈의 작품에서 비예가스가 발견한 오브제들은 여러 형식으로 결합되어 마치 아담과 이브가 신으로부터 버림받아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해야하는 형벌(노동=극복)을 보여주듯 오늘날의 또 다른 ‘신=인간의 문명’으로부터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소외(버려짐)된 이주자들의 현장을 대변하는 듯 하다.

자가 건축(The Autoconstrucción), Walker Art Center, 2013, Minneapolis

TV, 보드 판, 의자, 빨래, 자전거, 부식된 시계등등의 생활 물건들이 건축물의 기본구조가 되어 하나의 생활공간(맥락)으로 탈바꿈되어 가듯, 이주자들(인간)의 정착(변신) 그리고 부합(적응)에대한 강한 욕구들이 하나하나의 오브제들로 수집되어 하나의 연결선상에 놓이는듯 보여진다.

아트 선재 전시 일부, 2015, 서울

삶의 터전을 구축하려고 했던 이주자들의 열정과 유머, 애환이 페자재 오브제들의 당돌한 변신을 통하여 느껴지듯, 비예가스의 작업은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 사회, 정치, 경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변신시키고 적응, ‘회개’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트선재 전시 일부분, 2015, 서울

유지 아게마쑤의 배경

한편 도시에서 작업하는, 또 한 명의 이주자라고 할 수 있는 작가가 유지 아게마쑤(Yuji Agematsu)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b.1956) 1980년부터 맨하탄에서 작품을 해오기 위해 오늘도 그는 맨하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유지 아게마쑤(Yuji Agematsu), Real Fine Arts, 2012, New York

야게마쑤는 매일같이 수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는 가운데 자신의 의식속에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장소와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마주하는 우연적 장소들을 구분짓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이야기 한다.

버려진 오브제=무의식

행위란 인식에 의한, 즉 합리적이고 분명한 목적 하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수집’이라는 행위의 뚜렷한 목적을 가진다. 수집이라는 행위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행위는 의도되어 있지만, 발이 내딛는데로 흘러 걸어간 길, 그래서 마주하게 되는 길거리 오브제들과의 우연한 만남은 무의식 작용에 의한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무의식이 개입해 자신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어쩌면 아게마쑤는 잃어버렸던 의식을 수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게마쑤는 분명 인식되지 않는 것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반복적인 행위와 관련된다. 그가 무의식을 의문하는 지점이 바로 ‘수집=버려진 오브제를 발견’하는 지점과 동일시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명확하지 않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 반복하는 작업, 그것은 작가로 하여금 ‘자신 스스로의 알 수 없었던 지점(무의식)’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며 곧 미지의 자신을 탐구해가는 작업이라고 볼 수있다.

<Zip; 03–01–12….03–31–12>, Brooklyn Museum, 2012, New York
<01–01–2014–12–31–2014>, Real Fine Arts, 2015, New York

그는 뉴욕으로 온 후로 계속 도시에 버려진 부산물들을 주목했다. “이 도시는 새로운 건물, 새로운 오물을 만들어내는 기계이다. 나는 매일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관찰하고 그것을 모은다.” 거리의 껌, 곰팡이, 돌 부스러기, 먼지, 담배꽁초, 머리카락, 등등.

의식이 다다르지 못한 곳

그에 의해 채집된 온갖 것들이 여러 형상으로 결합되어 사람들 앞에 다시 섰다. <01–2014–12–31–2014>라는 전시에서는 365개의 투명한 담배 비닐갑 안에 채워진 365개의 갖가지 오묘한 형태들이 하얗고 깨끗한 전시공간 안에 투명한 선반 위에 층층이 놓여졌다. 그것은 마치 제의를 위해 제단에 올려진 신성한 제물처럼 보이며 옛 시간과 지층을 떠올리게하는 고고학적 유물로 다가오기도 한다. 버려진 것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그것들이 우리 눈에 안보인다고 해서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지지 않으며, 어느 처리장으로 가서 분해가 되더라도 다른 형태로 다시금 우리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다만 버려졌을때 우리의 의식이 다다르지 못한 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아게마쑤의 작품은 내가 버린 물건들이, 내가 만든 쓰레기와 지난 여름 죽은 곤충과 벌레들이 어떤 인연으로 돌고 돌아 내 앞에 다시 서는지, 그와 동시에 나의 지나간 시간의 죽음과 사라짐을 환기시켜주는 것 같다.

사회적 약자, 소외된 문제, 버려진 물건들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이나 기억은 의식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잊혀졌던 것들을 다시 ‘의식의 수면’(전시장) 위로 끌어 올리는 것. 이것이 비예가스와 아게마쑤에게 공통되는 점이 아닐까. 두 사람의 작품은 오늘날 우리의 의식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던 ‘버려진’, ‘쓸모없는’ 것의 정체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함으로써 다시 의식의 영혼을 부르기 위해 손짓하는 듯 보인다.

Untitled (March 15, 2012), 2012, Real Fine Arts, New York
<01–01–2014–12–31–2014> 설치의 부분 작품들

Artphilpost 작성자: 이경 & 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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