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속의 Toastmasters. part 1.

앞으로 쓰게 될 Toastmasters에 대한 나의 글은 아마도 중구난방의 정신없는 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의 중심 주제나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삶과 같이 얽히고설킨 인생의 한 부분에 대한 글일 것이다. 그러나 스티브잡스가 얘기했듯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뒤죽박죽인 내 삶의 많은 점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나의 인생을 만들고 있었다. 이 글은 내 삶 속의 몇 개의 점과 몇 개의 선에 대한 이야기이며, 누군가에게 읽히기 보다는 내 자신과 내 딸, 재인이를 위한 기록이다.

지난 10년동안 내 삶을 뒤돌아 봤을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라는 한 권의 책과 Toastmasters 클럽 활동이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큰 영향을 주엇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힘들지만, 둘은 다른 방식으로 내 삶을 바꾸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는 한 순간에 어떤 깨달음을 주면서 내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었따면, Toastmasters 활동은 활동 당시에는 나 스스로도 모든 것을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내 삶을 바꾸었다.

난 KAIST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기계과를 최우수로 졸업했으니 객관적인 기준으로도 성적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엄청나게 좋았다기 보다는 꾸준히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고, 이것은 대학교 1학년 때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고등학교 친구의 영향이 컸다. 지독히도 꾸준히 열심히 하는 그 친구는 결국 카이스트 학부 전체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던 4학년 시절, 그 당시만해도 별다른 생각없이 연구자의 길을 가고자 했고 비슷한꿈을 가진 많은 학생들처럼 어렴풋이 대학교수를 꿈꾸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여자 친구는 카이스트 내에서도 머리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 중의 하나였고, 나와 사귀던 시절 이미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로 대학원 진학이 결정된 상태였다. 나도 유학을 고민할 시기였기 때문에 그 당시 여자친구는 같은 시기에 미국 유명 대학교에 대학원 진학이 결정된 선배들을 소개시켜주었다. NYU 응용수학과에 진학하는 수학과 선배, MIT로 진학하는 기계과 선배 등등. 같은 과에서 한 학년 선배인 MIT로 진학하는 선배의 조언이 실질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는데, 나에 대한 그 선배의 평가는 MIT는 입학심사 결과를 예측하기가 힘들어서 알 수가 없지만, 스탠포드나 버클리 기계과 정도는 충분히 해볼만한 스펙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때만 해도 난 교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졸업 전 떠난 프랑스에서 보낸 1년 동안의 교환학생 경험은 내 삶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나에게 유학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몇 년 후에 나와 결혼할 새로운 여자 친구를 만났으며, 프랑스 생활에 적응에 완전히 실패하면서 내 인생 최초로 크나큰 좌절과 시련을 겪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해 생애 첫 우울증을 경험했다.

1년간의 프랑스 생활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유학에 대한 생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접었다. 새로 사귀기 시작한 아내와의 연애도 있었고, 해결하지 않은 군복무 문제도 있었지만,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싫었기 때문이다. 유학을 포기했을 때, 이상하게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서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영어를 생활화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이라고 해서 모든 교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교수도 아닐 것이고 타지 생활과 외국인 차별에 따른 예상되는 많은 어려움, 원하는 지도 교수를 얻지 못할 확률 등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카이스트에서의 연구 생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상태가 좋아져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가 남게 되고 때떄로 이 상처가 아렸다. 석사 2년차였나 박사 1년차였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여자친구(현재의 아내)가 두 달 동안 미국에 갔었고, 이 기간 동안 나의 우울증이 재발하여 상태가 좋지 않았다. 걱정이 됐던 여자친구는 나에게 취미나 클럽 활동과 같은 즐길거리를 만들라고 조언했고 그 때 만난 것이 Toastmasters였다.

첫 사랑에 빠지듯 Toastmasters에 빠졌다. Toastmasters 첫 모임의 기분좋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Ali가 했던 스피치, 모든 것들이 영어로 이루어지는 모임. 잘 짜여진 운영 방식, 모임 후 술집에서 이루어지는 뒤풀이에서도 모든 것이 영어였다. 심지어 한국 사람끼리도 영어로 얘기했다. 한국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모든 것이 영어인 곳. 영어의 생활화. 내가 미국 유학을 포기하면서 유일하게 아쉬워 했던 것을 발견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꼭 prepared speech를 하고, 매 모임마다 어떤 역할이든 하나는 맡아서 했고, 2차 술모임에도 빠진 적이 한번도 없었다. prepared speech를 준비할 때면 새벽까지 연구실 화장실이나 건물 옥상에서 리허설을 하곤 했다.

이토록 즐기면서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한가지가 더 있었는데,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스피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연극’을 한 적이 있냐고 물었었고, 실제로 스피치를 준비할 때도 한 편의 연극이나 쇼를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알겠지만 나에게는 약간의 똘끼 혹은 쇼맨쉽이 있는데, 고등학교 봄 소풍 장기자랑 시간에는 친구 2명과 황신혜 밴드의 ‘닭대가리야’에 맞추어 코믹 댄스를 했었고, 그 이후로 소풍이나 학교 축제가 있을 때에는 빠지지 않고 친구 몇 명과 코믹 댄스를 했다. 마지막 공연은 대학교 1학년 때 KAIST 학부 매점에서 했던 ‘경남과고 장기자랑(?)’ 무대에서 였다.

즐기면서 열심히 했으니 빠르게 스피치 실력이 늘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2010년 한국에 있는 모든 Toastmasters 클럽이 모이는 fall conference prepared speech contest에서 원어민 스피커들을 제치고 우승을 했고, spring conference에서는 즉흥연설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스피치를 녹음해서 세계에 있는 toastmasters club과 경쟁하는 international speech contest에서 3등을 차지했다.

애정을 가지고 클럽 활동을 했으니 클럽 운영에 관련된 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클럽 운영진 역할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클럽 회장까지 하게 되었다. 이 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리더십에 대해 의식적으로 고민했다. 이전에도 대학교 과대표나 삼성 대학생 교육 자치회장과 같이 리더십의 자리로 불릴만 한 역할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 때만해도 별 생각없이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한 것이었다.

회장 임기가 끝날 때쯤, 나는 더 해보고 싶었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한 조직을 이끄는 것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연임을 위해 도전했지만 선거에서 아쉽게도 패배했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럼 내가 하나 만들지 뭐.’ 이렇게 해서 KAIST 옆에 있는 충남대학교에 Toastmasters 클럽이 시작된 것이다.

Show your support

Clapping shows how much you appreciated Keun-Ho Bae’s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