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배가 부르다.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면 서운해 하실테니 늦은 저녁을 먹었더니 소화가 잘 안된다. 졸리지만, 잘 수가 없으니 전에 읽었던 책 중 하나를 골라 간단하게 글을 써보려한다.
이 책은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현우 씨의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보고 알게 되었다. 먼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게 된 경위 부터 봐야겠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다음 봄학기에 들을 수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동기들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수업을 듣는 것처럼 제 2외국어를 하나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 하나씩 짚어가다가 선택한 것이 러시아어였다. 처음보는 키릴문자가 신기해보였고 이상하게 그냥 끌렸었다. 그리고 직접 배워보니 문법이 너무 어렵긴 했지만 필기체 쓰는 맛은 만족스러웠다.
러시아어 공부하는 동안 관련 네이버 카페에 가입했는데, 거기서 이벤트를 하나 했다. 새로운 책이 하나 출간되는데, 책을 증정 받는 대신 서평을 쓰는 것이었다. 응모하여 책을 받았고 그게 로쟈님의 책이다.
이 책에서 투르게네프를 사실주의 작가로 소개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에 매력을 느껴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선택한 책이 <첫사랑>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 등이 시대를 보여주는 작품인 반면, <첫사랑>은 대표적인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2014년 여름 당시 나에게는 이 책이 꽤 맘에 들었었다. 주에 3~4일 씩은 지방에 내려가서 조사를 하던 때였는데, 이 책이 작고 얇아서 가방에 넣어도 부담이 안 됐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같은 이유로 이 책을 골라 늦은 리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아저씨들이 서로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투르게네프 본인을 그린 듯한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본인은 말솜씨가 없으니 노트에 적어서 읽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찌 보면 많이 봐온 전개 일 수도 있지만, 미묘한 이유로 아주 적합한 방식이라 생각한다. 먼저 블라디미르가 투르게네프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기에 말솜씨가 없어 글로 보여준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말주변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문장을 읽으면서 마치 그 노트 속으로 휘리릭 빨려들어가서 어릴적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미지를 상상 할 수 있었다. 꽤 마음에 드는 도입부였다.
내용 자체는 블라디미르의 어릴 적 첫사랑 이야기. 로쟈님은 이 작품을 가지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니, 그래서 아직 블라디미르가 독신인 것이니… 설명을 하셨다. 나는 그런 건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지나이다가 아주 남자를 잘 다루는 여자라는 것. 자신과 가까워 질 수 있는 상과 복종을 요하는 벌을 잘 활용하여 남자들의 애를 태운다. 벌칙 혹은 지나이다 손에 키스를 할 기회가 주어지는 제비뽑기를 하는 벌칙게임이 그 예가 되겠다.
그리고 심리묘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지나이다의 얼굴은 어둠속에서 내 앞에 조용히 떠다녔다. 떠다니고 또 떠다녔다.” (p. 66)
“그저 낮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기에 바빴다 …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그러나 나는 지나이다를 피할 수는 없었다 …” (p. 133)
블라디미르가 자신이 지나이다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자각한 밤에 잠을 못 이루는 상황. 그리고 후에 지나이다가 사랑에 빠졌음을 직감한 후 지나이다와 함께 있는 다른 남자들을 유심히 살피는 모습, 그리고 그 연적의 정체를 알았을 때의 충격. 이런 순간에서 어린 블라디미르의 심리 상태를 아주 공감되게 묘사했다. 읽는 재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