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좋은 삶

Woojung Kim
C.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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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in readOct 31, 2021
[Photo by Timon Studler on Unsplash]

작년 6월 짧은 기획안을 들고 SH 서울주택도시공사 주거복지처와 만났다. 지원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더 많이 알리자는 제안이 담긴 기획안이었다. 사는 형태에 따라 사회적 프레임이 씌워져 그 안에 갇혀 살아가는 누군가들, 행복지수 설문조사에서는 제외되는 누군가들, 무엇보다도 어딘가에 갇혀 자아를 잃은 채 살아가는 누군가들이 사실은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다우며 존엄한, 함께 살아가는 내 이웃임을 알리면 좋겠다는 내용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던 날, 연구의 마침표를 찍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일회성 프로젝트로 마침표를 찍기에는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하나하나가 숭고하여 진한 울림으로 여운이 계속해서 남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태어난 모습 그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세상 뒤에 숨어지낼 수 밖에 없었던 이름들. 이들의 이름이 드러나 삶의 자유를 누리기를, 그리고 우리의 이웃으로 더 많은 관계를 가지며 삶이 풍부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던마음이 컸었다.

지금 내 머릿속의 시계는 열심히 뒤로 뛰어 가고 있다. 연구를 위해 모였던 팀이 공부를 하며 준비를 하던 순간,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며 가슴이 뛰었던 순간, 이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어색함의 순간들을 지나 긴장하고, 울고, 웃고, 개통해했던 순간 하나하나까지도 다 끄집어내보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만났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보고자 한다.

Chapter 0

지원주택 개념 및 의미
지원주택은 주거지원과 생활지원 서비스가 함께 제공되는 주거모델로 주거복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위해 SH 서울주택도시공사가 2016년부터 시범사업을 진행하였고, 안정적인 독립생활, 건강호전, 사회적 편익 효과, 성공과 실패의 경험 바탕의 자립생활을 통한 삶의 긍정적인 효과가 두드러지면서 2019년부터 본격적인 공급이 시작되었다.

지원주택은 주거우선 접근 개념에 입각한 모델로 탈시설 사회를 가능하게 할 핵심적인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지원주택이 물리적인 공간 제공만으로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원주택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고유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삶을 살면서, 고립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삶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데 있다. 곧 지원주택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공간으로서 바라보아야하는 것이다.

프로젝트 컨셉 구체화
연구 초기에는 ‘지원주택’, ‘지역 자립’, ‘시스템적 접근’, ‘디지털 아카이빙’ 이라는 4개의 단어 외 뚜렷하게 정해진 것이 없었다. 연구의 방향성과 결과물을 고민하면서 무엇이 그 중심에 있어야 연구가 흔들리지 않고 완수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을 때, 선경의 제안과 추진으로 ‘행복한 삶; 장애 자녀를 위한 미래 설계 7단계’ 책을 출판하기도 한 캐나다의 아쇼카 펠로우인 사회적기업가 앨 애트만스키 (Al Etmanski)를 만나게 되었다.

앨을 만났을 때 나는 연구의 접근법, 구체적인 방법론, 예상 결과물 등등 기술적인 면의 걱정 만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좁은 시야로 연구에 다가 갔었는지 이제야 보이는 것 같다.) 그 때 앨이 건넨 한 마디는 나의 편협한 생각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왜 멋진 결과물, 솔루션을 낼 생각부터 하니? 사람에 집중해보렴. 니가 보려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 그들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가 보일 수 있어. 그러면 각자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다양하게 나올꺼야. 시스템에 사람을 끼워넣지 말고, 각자 다른 필요가 있는 사람에 맞춰 시스템을 디자인해야해. 각자에게 좋은 삶,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잊지마.

유레카! 나의 고민의 실타래가 풀려지는 순간이었다. 이 후 우리는 연구의 초점을 사람에게로 이동하였고, 각자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연구 방법론
연구의 차별점은 개인의 삶과 사회구조를 결부 지어 보고자했던 것이다. 또한 참여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서사화 능력과 성찰적 역량이 강화 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특히,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해가는 과정을 통해 참여자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려볼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참여적 구술생애 기반 디지털 영상화, 언어이외의 수단으로 표현하기위한 포토보이스 기법, 표면적 문제보다는 이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패턴과 구조에 집중하는 시스템 매핑 워크숍 등 다양한 방법론을 활용하였다.

무엇보다도 연구팀은 연구기간동안 관련 자료들을 스터디하며 참여자에 대한 사전 이해, 당사자와의 라포 형성, 깊게 듣는 자세와 태도, 소통방식을 고민하며 연구 참여자와 짧은 시간 내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생각보다 더욱 큰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의 삶을 댓가없이 훔치는 것은 아닌지,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지, 상처를 끄집어내며 괴로워하지 않을지 등등 여러 고민이 쉴새 없이 오갔다. 그러나 인터뷰 후 대체적으로 받았던 반응은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삶을 정리해 볼 수 있었고, 뭔가 후련하다.’ ‘나를 돌아볼 수 있었고, 조금 더 담담 해진 것 같다’ 등 감사의 이야기가 많았다.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잠시 당황했던 순간도 생생하다.

연구가설과 주요 프레임
연구는 시설이 없는 사회에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 그대로 사는 모습을 상상하며 시작하였다. 이에 ‘누군가는 지역사회에서 자립하여 함께 살아갈 수 없다’라는 가설을 수립하고 고유성과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았다. 또한 개개인의 고유한 ‘좋은 삶’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로 전환해야하는지 탐구하기 위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핵심적으로 다루었다. 연구는 지원주택을 중심으로 불안정한 주거 경험을 공통 분모로 두고 사회적 낙인과 배제를 수반하는 문제를 복합적으로 경험한 주체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결과요약

집은 ‘장소’, ‘몸’, ‘정체성’, ‘공동체’, ‘가족’을 뜻하는 우리를 품어주고 지탱해주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중에서 -

연구의 주요 시사점은 ‘돌봄 시스템의 전환’과 연결되어있다.

집은 ‘계급’, ‘젠더’, ‘장애’, ‘정체성’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가 응축되어 나타나는 사회적 공간이자 삶의 모든 사건이 연결되어 자아를 만들어가고 또 그 모든 것이 기억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폭력과 차별, 중독, 관계 해체, 정상성 이데올로기로 삶이 흔들리게 되는 시점은 집, 또는 내가 주요하게 머무는 공간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예를들어, 연구 참여자의 대부분은 거주하는 집과 시설에서 폭력을 경험 하였으며, 폭력이 일어난 공간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장소로 이동을 시도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오는 공포로 삶이 무력화되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며 삶이 흔들리는 특징을 보였다. 이로 인해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홀로 고립되어 사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시설에서의 삶은 지역사회에서의 배제와 차별 그리고 시설 내에서의 배제와 차별이라는 이중적 경험에 노출된다. 이에 누군가를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보호를 위해 누군가에게 과하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삶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경우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확보하기 어려워 자립 자체를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였다.

장애와 노령 같이 눈에 도드라지는 취약성으로 비 장애 중심의 정상 사회 공간에서 차별과 배제 그리고 부당한 시선을 경험한 경우에는 관계의 확장이나 새로운 역할 정체성 형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정상기준에 부합되는 요구와 속도에 맞추어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을 두려움과 스트레스에 맞서 싸우거나 자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인식하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도 살펴볼 수 있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고착된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거나, 매일을 고통스러운 관계 안에 갇혀 살아내고 있거나,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자아로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 모든 경우 친밀한 돌봄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사람들과 관계 형성의 어려움이 쉽게 나타나 자신을 학대하며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지원주택은 ‘좋은 삶’을 만들어나가는데 중요한 지역사회 자원이었다. 폭력으로부터 공포에 휩싸여 지냈던 연구 참여자는 지원주택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 생겼고, 시설의 통제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가 지원주택에 살면서 일을 경험해 본 연구참여자는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뿐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그 취향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에 대한 꿈을 갖게 됐다. 알코올 의존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던 연구 참여자는 지원주택을 지속적으로 ‘회복’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로 생각하며 자신과 유사한 상황에 있는 이웃들을 보살피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기도 하였다. 유년기부터 충분한 돌봄을 경험하지 못한 분은 지원주택에서 만난 이웃들과 함께 서로의 삶을 나누고 위로하며 또다른 가족의 형태로 지내며 서로 함께 나이 들어가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즉 지원주택은 강제되고 지배되는 삶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미래로 다시 걸어나갈 가능성을 열어주는 공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보이고 나의 삶이 보이기 시작하는 공간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지원주택의 이웃들과 서로를 돌보아주고 힘이 되어주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지원주택이 사회적 돌봄 공간으로 그 역할을 이행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지원주택을 넘어서 지역사회 내에 더 많은 관계들과 연결되는 것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이를 위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돌봄 패러다임이 시급하게 전환되어야 한다는데 목소리를 모을 수 있었다.

돌봄의 방향성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생각
지금까지 돌봄은 결핍에 집중하여 시혜적 태도로 행해져 왔으며 그 가치도 폄하되어왔다. 그 결과 제도화된 돌봄 정책 역시 정책대상자 개개인의 상황이나 당면한 문제가 상이함에도 정해진 범위 안에서 한정적으로 적용되며, 전인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하였다. 스스로 자립한다는 것은 언제나 호혜적 돌봄이 주위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을 전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돌봄은 그 과정에서 서로 주고 받으며 관계와 감정을 쌓는 상호작용이 필수적으로 작동해야한다는 것이다.

호혜적 돌봄이 사회 전반적인 문화로 전환하려면 연립이 실현되는 ‘보편적’ 돌봄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돌봄을 삶에서 가장 우선시하며 개개인의 상황에 맞는 돌봄을 서로 교류할 때 어느 누구도 고립되거나 배제되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함과 취약성을 존중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좋은 삶’, 그것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안정된 주거공간 외 다양한 사회 관계망, 소프트 스킬 강화, 다양한 형태의 자원 연결 등 전인적 성장에 필요한 역량을 계속해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발딛고 서있는 이 곳에서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상호 협력 및 상호 의존 기반의 ‘관계’가 지속해서 흘러야한다. 이 ‘관계 교류’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하며 삶의 꽃을 피울 수 있게 하는 요소인 것이다.

여기에 담은 이야기는 사실 우리 연구팀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전조였다. 앞으로 우리가 경험한 진짜 삶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되새기며 조심스레 풀어나가려고 한다. To be Continued.

*위의 글은 씨닷과 SH서울주택도시공사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수행한 ‘지원주택을 위한 당사자 참여서사 연구 및 디지털 아카이빙 연구’ 결과보고서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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