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과 나_ 지원주택 입주자 이야기

Sunkyung Han
C.Note
Published in
7 min readApr 28, 2022

제 5회 지원주택 컨퍼런스 2일차에서는 지원주택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세션 6은 입주자가 참여하셔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하는데요. 공교롭게도 이야기를 들려주실 분들이 씨닷이 진행했던 ‘지원주택 당사자 생애 참여 서사 연구 및 디지털 아카이빙’ 사업에 함께 해주셨던 분들이세요.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세션이라 참여하기 어려운 분들과 지원주택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으실것 같아 간략하게 정리한 세 분의 이야기를 이곳에 먼저 공유합니다.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세션에 참여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등록링크 에서 등록하시거나 사무국(supportivehousing@cdot.asia)로 연락주셔도 됩니다. 세션 5와 세션 6은 ‘용산 베르디움 프렌즈 101동 2층 프렌즈홀’에서 진행됩니다.

이용찬 님의 삶 이야기_세상을 산책하기,삶을 새로 쓰기

“막상 용기를 내서 독립하고 나니까 자유롭고 편안하고, 간섭받지도 않고. 그리고 자유롭게 혼자서 제가 살던 북가좌동에도 가보고… 손님이 와서 자고 갈 수도 있고. 그게 조금 좋았던 거 같아요.”

집이라고 하면, 과거 가족과 함께 살던 서울시 은평구 북가좌동의 집과 현재 자립해서 혼자 살고 있는 지원주택이 떠오른다.

첫 번째 집과는 스무 살에 이별을 했다. 네 살 때 뇌성마비, 늑막염, 소아마비에 걸린 이용찬 님은 여덟 살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먼저 하늘로 떠나고,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민 간 누나를 뒤따르면서 용찬 님은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한 시설로 보내진다. 그곳이 지옥과 다름없는 무허가 시설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원장 부부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무려 20년 동안 그곳에 감금된다.

이후 췌장암 선고를 받고 귀국한 어머니와의 재회 덕분에 그 시설에서 겨우 벗어나지만, 3개월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도란도란’이라는 다른 시설로 옮겨진다. 그곳에서는 김천 시설과 달리 자유롭게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었다. 방이 3개인 집에서 4명이 함께 사는 체험홈 생활을 했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거인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런 고충을 털어놓을 선생님조차 없어 더욱 힘들었다.

시설에서 나가겠다는, 나가서 자립하겠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 이는 김치환 복지사다. 지원이 전부 중단될 거라고 협박하는 원장을 뒤로하고, 용찬 님은 그곳 생활을 10년 만에 끝낸다. 두려웠지만 굳게 마음먹고 밖으로 나섰다. 도합 30년, 빼앗긴 세월과 짓이겨진 마음이 무게 추가 되어 발목에 걸렸지만 용찬 님은 힘찬 걸음을 옮겼다. 2020년 4월 1일,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살 곳을 정한다.

지원주택에 입주한 첫날은 든든한 지원자인 김치환 복지사와 함께 지냈다. 실감이 안 됐지만 차츰 적응했다. 무엇보다 손님이 ‘내 집’에 묵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유롭고 편안해진 일상 속에서 용찬 님은 과거를 다시 마주한다. 여전히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에 괴롭지만, 이제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얘기할 수 있다. 용찬 님만의 속도와 높이로. 그러니 꿈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여러 겹으로 포개진다.

이혜랑 님의 삶 이야기_집의 의미를 회복하는 여행

“집은요, 예전에는 끔찍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저한테 아주 중요하고 안정을 주고 그런 곳이죠.”

이혜랑 님은 ‘오지라퍼’다. 본인이 인정한 사실이다. 지루한 거라면 딱 질색이고,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남들을 재밌게 만드는 일이 좋다. 그래서인지 이곳 지원주택 이웃들 역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혜랑 님은 이제 안정감을 느낀다. ‘집’을 찾기까지 겪은 우여곡절이 눈앞을 스친다.

유년 시절의 집은 폭력이 일상처럼 이뤄지던 끔찍한 공간이었다. 일찍부터 거리를 배회하며 일진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 이유다. 그러다가 강제 전학 처분을 받기도 하고, 결국엔 퇴학을 당해 학교를 그만뒀다. 그 후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밥 사 먹을 돈이 떨어져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은 의미를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20대 초반에 만난 한 남자와 동거를 하면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사업이 틀어지자 술에 의존했고, 기어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래서 탈출했다.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술을 잔뜩 마시고 자해를 했다. 다행히 구조되었지만, 갈 곳도 의지할 이도 없어 다시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동생에게 이끌려 시설과 정신병원에 가게 됐는데,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빠져나오고 다시 들어가길 반복했다.

고시원을 전전하다 찾은 열린여성센터는 몹시 낯선 분위기였다. 군대 같은 시설식 생활이 아니라 자유가 보장됐기 때문이다. 동료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센터의 소개를 받아 카페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때 처음으로 ‘정착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난생 처음 세간살이를 내 돈 주고 사본 것이다. 너무 애착이 갔고 하나하나 늘어선 모습을 보니 행복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서, 자립하기로 마음먹는다.

혜랑 님은 음악에 몰입할 때 즐겁다. 더 좋은 디제잉 기계를 사고, 공연도 하고 싶다. 지금 이곳 지원주택에서 이웃들과 서로를 돌보며 살다 보니 삶을 정의하고 앞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좋은 삶이란 함께 두루두루 돌보는 삶이고 서로를 통해 배우고 닮아가는 삶이라 한다. 다시 말해, 새출발이다. 여전히 순탄치 않을지 모른다. 실제로 자립을 결심하고 여기 오기까지도 수차례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호영선 님의 삶 이야기_자유롭게 날기 위해 잠시 머물다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여기 살림 차리러 온 게 아니고, 장애인이라는 표현도 안 쓰겠다고. 그럼 뭐라고 부를 거냐, 작은 용들이 넓은 세상 넓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 잠시 머무는 용굴이라고.”

2019년 11월, 시설에서의 마지막 밤. 잠자리에 누운 호영선 님은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내일이면 미지의 세계가 시작될 터였으니 당연했다. 한편으로 기대도 됐다. 이곳에서 14년을 살았으니 못할 게 없었다. 뜬눈으로 아침을 맞고서 지원주택에 입주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방은 충분히 따뜻했고, 창문이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후리덤!” 온몸에 감겨 있던 사슬이 끊긴 한 마리 용이 된 것 같았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밤새도록 소리쳤다.

영선 님은 줄곧 ‘자유분방’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보는 장인에게 바락바락 대들 정도로 스스로 결정한 삶에 대해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참지 않았다. 확고한 취향도 있었다. 디제이가 되고 싶어 노래 다방에서 레코드 정리 아르바이트를 일부러 겸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손으로 빚고 만드는 작업을 즐겨 도자기 회사에 취직했다. 후에 지방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지인의 도자기 사업에 도움을 줬다.

불운은 불현듯 찾아와 도미노처럼 영선 님을 덮쳤다. 부모가 물려준 논밭을 밑천 삼아 친구들과 개시한 청과물 도매업이 파산으로 끝이 난 데다가, 책상 위에 발급 신청서가 수두룩이 쌓일 정도로 무분별하게 발급한 카드가 거대한 빚이 되어 돌아왔다. 더 이상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기 어려워 전 재산을 가족들 명의로 돌리고 도피를 시작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숙소 생활을 했다. 그러다 파이프에 머리를 맞는 사고를 당해 중도장애인 판정을 받고,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옮겨졌다.

2005년, 영선 님은 김포에 있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시설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엔 적응하지 못했다. 시설은 교도소처럼 일정한 규율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갑갑한 곳이었다. 그러한 생활이 죽기보다 싫었기에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다. 1년이 지나고서는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장 예뻐했고, 자신을 잘 따르던 자식이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심이 컸다. 이후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의 관계도 정리했다.

시설에 머문 지 10년이 넘어가자 비로소 바깥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탈시설 정책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지원주택 사업의 프로세스와 안정성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음센터, 장애인인권, 발바닥행동 등 주변의 설득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용기를 내어 자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도 1층 현관으로 담배를 피우러 갈 때면 그때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 사이 벌써 1년이 지났다. 코로나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올해 이루고 싶은 꿈도 생겼다. 거실에 있는 4인용 식탁을 홈카페처럼 꾸미는 것이다. 꽃병에 꽃을 꽂아 두고, 직접 색칠한 그림도 붙여두고 싶다.

*글 : 김홍구

--

--

Sunkyung Han
C.Note
Editor for

CEO (C.), 15 years connector and catalyst in social innov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