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템’은 창고 구석에서 블록체인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Kodebox
4 min readAug 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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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내 흔적들이 언젠간 사라진다는거, 조금 슬픈 일 아닐까. 적어도 난 그래. (출처: 내하드디스크)

오랜만에 게임에 접속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 게임이 몬스터 헌터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건, 퍼즐앤드래곤이건 마찬가지다. 그래야 괜히 아이템 찾는다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을 실수로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도, ‘효율적 게임 플레이’라는 관점에서 남들에겐 하찮기 그지없을 물건들도 있다. 몇 번의 확장팩을 거치며 이제는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장비와 소모품들, 탐험을 나가면 몇 마리는 우습게 잡을 수 있는 물고기와 몬스터의 소재들, 더는 내 파티에 어울릴 수 없는 등급 낮은 몬스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터지기 일보 직전의 창고에 이들의 자리를 남겨 놓는 것은 거기에 게임 속 나의 추억과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버와 클라이언트는 이런 나의 이야기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게임마다 있는 ‘창고 정리’ 버튼을 한 번만 누르면 자기 기준대로 아이템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만든 사람이 달라도 포션은 그냥 포션이니까, 몬스터의 꼬리는 내가 초보시절 겨우겨우 잘라낸 것이든 숙달된 뒤 5분도 안되어 잘라낸 것이든 아무튼 꼬리니까, 하며 창고 한 칸에 한 뭉치가 되어 쑥 들어간다. 그러면 내 추억은 그 안에 몇 번째로 담겨 있는지, 아니면 이미 내가 써버렸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정말 모든 게임이 그랬을까? 과거 커뮤니티성이 강했던 온라인 게임에는 사실 이와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일례로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특정 직업들이 있었고 그들이 제작한 아이템에는 제작자의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그 제작자들 중 순위를 매겨 소위 ‘랭커’가 되면 더 좋은 성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더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었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제작무기(출처)

하지만 이 역시 누가 만든 지는 알 수 있지만, 한 마을에 똑같은 사람이 만든 수 많은 제작무기들 중 하나일 뿐이기에 개인의 이야기를 담는 것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아이템에 담긴 사연과 사건은 그저 게이머의 머릿속에, 혹은 몰래 숨겨둔 블로그나 일기장에 남아 있을 뿐이었고 그 이야기가 담긴 아이템이라는 증명은 불가능했다.

블록체인으로 아이템을 오롯이 내것으로 만든다는 건어떤 의미일까? 유저에게 당당히 거래할 자유를 주는 것, 단지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흔하게 굴러다니는 단검과 물약, 용의 뿔에 대한 사연과 기억을 메타데이터에 담아 자산으로 발행하면, 그것은 더 이상 흔해빠진 아이템이 아니라 블록체인이라는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는 나만의 전시품이 될 수 있다. 아이템의 기능적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이미 이 아이템은 게이머의 기억을 담아두는 역할로 충분히 본분을 다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템들이 하나 둘 모여 게이머 한 명의 이야기가 된다. 작게는 동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추억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유저들 사이에 각인될 어떤 사건의 주인공 혹은 일원이 되어 그 아이템들이 공공의 가치를 갖게 되는 날도 있을 것이다. 서로 협력하여 세상을 구하는 온라인 게임의 재미에, 그 게이머 한 명 한 명이 갖는 개성과 게이머간의 관계성을 드러내며 하나하나 특별한 이야기를 가진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얘기엔 항상 빠지지 않는 리니지2의 바츠 혁명 전쟁. 게임 속의 거대한 사건이 역사로써 기록되고 그 아이템들이 유산이 된다면? (출처)

디지털이 꿈꾸는 종착점은 결국 아날로그라는 말이 있다. 블록체인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기술이면서도, 아날로그의 고유함과 연속성을 갖출 수 있는 기술이다. 나만의 고유한, 계속되는 게임 속 ‘나’의 이야기를 시간이 흘러도 변질되지 않는 디지털 속에 기억할 수 있다면 이 말의 증거가 되지 않을까. 나의 게임 속 역사를 기록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디지털 세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 블록체인을 통해 그런 미래를 그려본다.

Originally published at medium.com on August 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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