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화가 꼭 나쁜 것일까? — 수정 탈중앙화의 시대가 온다.
Trustless & Responsibility
Web3 씬에서 내놓는 “Trustless” 라는 내러티브는 매우 멋있고 재미있다. 코드에 다 적혀 있으니 서로를 믿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 그래서 누군가 책임을 물을 주체도 필요없고, 완결성 있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내러티브이다
Value Transfer 기능만 있었던 비트코인, 혹은 사전에 정의된 함수만 사용가능한 리플과 같은 체인에서는 이것이 완벽하게 동작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리플 경우에는 재단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재앙의 시작(?), 이더리움
그러나, 이더리움에는 데이터가 아닌 로직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모두가 로직을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몇몇 DApp들은 아예 소스를 공개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DApp을 만든 주체를 믿을수밖에 없다. 심지어 TVL이 매우 높았던 Wormhole과 같은 프로토콜에서도 수천억단위의 코드오류로 인한 해킹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이러니다. Trustless한 시스템에서, Trustworthy한 서비스를 찾아야 한다니?
물론 이더리움이 멋지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부터가 EVM 기반의 블록체인을 메인 프로덕트로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러나 이더리움은 너무도 인간을 완벽하고 실수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다.
복잡하고 오류가 많은 스마트컨트랙트로 DeFi를 만들어 놓은 불완전한 에코시스템에서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Trustless하니까, DAO니까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수익이 어느정도 중앙화되고, 소수에게 싸게 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책임도 어느정도 중앙화해서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이다.
과연 중앙화는 Web3 가치를 해치는가?
혹자는 “완벽한 탈중앙화” 만이 진짜 Web3의 가치를 수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일 수 있겠으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 말은 “완벽한 공산주의가 가장 공평한 사회시스템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공산주의자나, “완벽한 자본주의가 제일 효율적이다” 라고 말하고싶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자의 말과 비슷해 보인다.
현실세계는 완벽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수정 자본주의로 굴러간다. 그리고 각 나라의 상황에 따라 약간씩 배합비율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복지)의 가치가 아예 사라지거나, 자본주의의 최대가치인 효율성이 사라졌는가?
크립토를 싫어하는 분들은 그냥 그럴거면 중앙화 해서 운영하지 뭐하러 크립토 하냐고, Web3 스타일과 블록체인 적용해서 되는거 하나 없더라라는 비아냥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냥 직접민주주의 안되니 그냥 왕정으로 돌아가자고 하는것과 다를바가 없다. 고쳐쓸 생각을 해야지 모른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갈아넣는 분야를 무가치하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수정 탈중앙화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수정 탈중앙화”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Web3의 가장 큰 가치는 Community-Driven Ecosystem이라는 점과, 모든 것을 토크나이징하고 소유권을 부여하는 개념, 그리고 보다 공정하고 투명한 거버넌스이다.
이것을 꼭 코드 기반의, Trustless한, 어쩌면 극단적인 탈중앙화로 이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것보다 어떻게 하면 Web3 가치를 더 편하게, 빠르게, 싸게 보여줘 대중화를 이룰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수정 탈중앙화의 기술적인 측면
나는 서비스를 리서치하고 데이터를 분석하지, 딥하게 블록체인을 다루는 코어 엔지니어가 아니기에 자칫 뜬구름 잡는 소리를 쓸 수 있으니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부디 친절하게 코멘트 부탁드리겠다.
먼저 완결성 이슈를 해결하지 못한 L1을 연산계층으로 쓰는 것과, 중앙화된 L2 (사실 이건 꼭 L2가 아니라 오프체인이어도 된다)를 쓰는 것이 큰 차이가 없으므로, 비싼 연산은 오프체인에서 처리하고 결국 기록이나 매우 간단한, 오류가 날 리 없지만 중요한 연산들만 합의계층인 이더리움 (혹은 더 단단하게 하고 싶다면 비트코인) 에 기록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닐까?
수정 탈중앙화와 DAO
수정 탈중앙화의 거버넌스는 현실의 거버넌스가 그랬듯이 직접민주주의와 독재 그 어딘가인 간접민주주의, 혹은 리퀴드민주주의 형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리퀴드민주주의와 보다 수평적인 SubDAO 체제가 결국 유망하다고 본다. 현실세계에서는 기술과 체제의 한계로 중앙화되고 수직적인 형태의 선출 기반 민주주의를 사용했다면, 블록체인 기술은 리퀴드하고 수평적인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수정 탈중앙화와 DeFi
여기는 Daily DeFi Digest니까, DeFi만 한 챕터로 따로 빼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DeFi는 어떻게 수정 탈중앙화에 적응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간단한 생각을 적어본다.
Terra 사태에서 내가, 우리가 배운 것
Terra 사태가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으니 설명을 생략하겠다. 내가 테라사태에서 느낀 점이 몇 가지 있다.
첫번째로는 사실 탈중앙화보다도 재단이 잘하면 드라이브가 빨리 되고 프로젝트가 정말 빠르게 성장하고 그들이 부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탈중앙화, Trustless라는 이상한 소리 아래서 얼마나 프로젝트 패망의 책임을 빠르게 홀더들에게 떠 넘길수 있는지를 보았다.
두번째로는 시스템의 문제다. 결국 수동적으로, 아무런 생산성 없이 자본만 공급하는데 이상하게 이자를 많이 받고 있다면 결국 두가지다.
사실상 남의 돈으로 만든 자신의 곳간을 털어 지속불가능한 이자율로 이자를 지급하거나,
다음 참여자들의 돈으로 돌려막기를 해주거나,
금융에는 책임과 컴플라이언스가 필요하다
금융은 약간은 중앙화되어야 하는 분야다. 누군가의 소중한 일생이 담긴 돈을 관리하는 분야니까 누군가는 안심시켜주어야 하고 책임을 지는, 혹은 보증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금융업자들의 모럴해저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지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지 않았는가?
DeFi 또한 금융업이니 예외는 아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완결성과, 코드 작성자를 신뢰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Code 기반 Trustless한 시스템이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해도 괜찮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며, 커뮤니티 기반의 유연한 금융시스템 등의 DeFi의 본질적인 가치는 지키고, 대신 어느정도의 책임을 중앙화된 주체가 져야 한다. 결국 나는 대부분의 DeFi가 “TradFi 혹은 CeFi, 그렇지만 DAO와 토크노믹스를 곁들인” 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DeFi 이자와 생산성
모든 금융활동 (특히 대출로 얘기하면 이해가 쉽다) 는 생산성을 위한 것이다. 내가 대출을 받았으면, 그걸로 밥을 사먹고 일을 하든 혹은 비트코인을 사든 누군가가 대신 대준 기회비용으로 그 이상의 생산성을 만들고, 기회비용에 대한 댓가(이자) 를 지불해야만 자본효율성을 높혀 세상의 발전속도를 더 빠르게 하는 모델이 지속가능한 것이다.
이런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대부분 DeFi의 스왑은 결국 스왑을 위한 스왑, 대출은 풍차돌리기를 위한 대출이 되어 제로썸게임이 될 뿐이다. 대출을 위한 대출, 거래를 위한 거래는 아무런 생산성이 없다.
혹자는 가상세계와 메타버스를 이용해 이런 생산성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결국 메타버스가 있어도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고 현실과 연결되기를 원할 것 같다.
중앙화된 주체가 어느정도 책임을 지게 된다면, DeFi의 Use Case가 부동산, 현실의 대출, 주식, 기타 투자상품 등의 다양한 자산으로 확대되고, 결국 그 자산들이 DeFi 머니레고를 더 다채롭고 지속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결국 DeFi가 지급하는 대출과 이자가, 단순히 풍차를 돌려 더 많은 이자를 만드는 시스템에서 실질적으로 생산성을 만드는 시스템으로 바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DeFi 규제에 대한 생각
위에 쓴 글을 보면 유추할 수 있겠으나 내 생각에 DeFi가 규제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혹자는 검열 저항성과 정부로부터 벗어난 금융 시스템을 외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부에 소속되어 있기를 원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DeFi가 주는 다양한 가치들을 버리고 낡고 썩은 금융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DeFi가 (적절한)규제(확실히 지금의 규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와 전통자산과 혼합될 때 나는 더욱 큰 시너지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보증주체가 있는 안전한 DeFi, 생산성을 만드는 다양한 자산과 생산력, 대출을 담보로 하는 머니레고 구성요소들을 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TradFi, 그리고 현재의 DeFi 시스템이 서로 타협해야 할 것이다.
결론
Web3, 그리고 특히 DeFi는 “극단적인 탈중앙화” 라는 유토피아에 가까운 내러티브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실현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완벽한 공산주의는 부패로 인해 망했지만 공산주의가 주장했던 더욱 공평한 사회구조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수정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이는 인류 거버넌스에 있어 가장 최신의, 그리고 안정적인 모델이다.
결국 어떤 서비스든 나는 Web3 향으로 갈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유토피아에 가까운 극단적인 탈중앙화에 기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Web2, 빅테크, 중앙화의 병폐가 드러났고, 그것은 Web3을 통해 치유될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탈중앙화가 아닌, Web2와 Web3의 중간, 어쩌면 우리가 수정 탈중앙화나 Web 2.5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서비스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