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사이퍼, 그리고 DE-FERENCE 2018

‘동아리'의 알을 깨고 나온 디사이퍼의 브랜드 런칭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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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이 만든 스터디 모임이 여는 행사에 주말 오전부터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지도교수도 없는 스터디 모임 주제에 이름도 거창하게 컨퍼런스라고 지은 데다가 오가기 불편한 서울대학교 깊숙이 안에서 열리는 오만한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신청이 마감됐고 당일까지 추가 신청과 현장 등록을 문의하는 연락이 쏟아졌다.

2018년 8월 11일 열린 서울대학교 블록체인 학회 디사이퍼(Decipher)의 첫 번째 컨퍼런스 DE-FERENCE 2018 이야기다.

서울대학교 블록체인 학회 디사이퍼 구성원

컨퍼런스를 언급하다

디사이퍼가 처음 컨퍼런스 개최를 논의한 것은 5월이었다.

당시에 학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아래 여러 연구 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는데, 이들에게 공통의 목표와 기한이 주어져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숱한 팀 프로젝트 경험상 기한을 잡고 밀어붙이면 무엇이든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김재윤(Ben) 회장의 제안으로 여름 방학에 컨퍼런스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총괄하는 일을 Gong Hyuncheol과 내가 맡았다.

컨퍼런스를 기획하다

컨퍼런스를 여는 데에는 합의했지만 아무도 컨퍼런스 뿐만 아니라 디사이퍼의 청사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지 않을 때였다. 우리는 누구이고, 이 행사를 왜 열고자 하며, 어떤 행사를 열고자 하는지 처음부터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우리는 누구인가?

디사이퍼는 2018년 3월에 만들어졌다.

전체 블록체인 생태계를 Business, Fund, Exchange, 그리고 Academy라는 4가지 축으로 바라보았다. Academy는 Business와 함께 기술을 선도하고 Business에서 제시한 기술을 검증하고 대중을 교육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축을 명문 대학들이 담당해주고 있는 반면, 국내에는 아무도 없었고 도움을 줄 교수님도 찾기 어려웠다.

해외 블록체인 생태계
국내 블록체인 생태계

그래서 우리가 만들었다. 현재 40명 가량이 활동 중이다.

왜 컨퍼런스를 열고자 하는가?

개인적으로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이다. 행사의 목적이 분명해야 연사 초청, 장소 등을 정하는 기준이 생긴다. 디사이퍼의 내부적인 목적은 분명했다. 연구 결과 발표와 리크루팅. 그러나 나는 이번 행사가 디사이퍼 내부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업계의 많은 구성원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컨퍼런스의 대의명분을 그려나갔다.

1. 한국이 기술적인 역량을 갖춘 국가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담론의 장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두고 한국에게 국가적인 기회라고 말한다. 전세계 암호화폐 거래 금액의 30% 가량이 한국에서 일어났고 국내 2~30대 직장인 중 50% 이상이 암호화폐를 소지하고 있다며 전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블록체인 산업을 이끄는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넘어서 ‘기술’적인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국내에 기술적인 담론을 다루는 자리가 너무나 부족했다. 그런 내용을 다룬다고 해도 여러 프로젝트의 대표들이 나와 각자 자신의 기술이 가장 좋다고 자랑하는 식이었다. 오히려 한 발 떨어져서 기술의 현주소를 짚고 토론하는 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 이해관계를 초월한 국내 구성원들의 화합의 장

국내 업계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지나치게 경쟁사를 의식하여 자신의 생각을 남들과 공유하기 꺼리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중립적인 회색 지대에 존재하는 디사이퍼라는 단체를 활용하여 이들을 한 데 모아 터놓고 생각을 공유하며 보다 건설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졌다.

어떤 컨퍼런스를 열고자 하는가?

그동안 많은 블록체인 관련 행사에 다녀봤지만 네트워킹을 제외하고는 얻어갈 것이 참 없었다. 애초에 이를 목적으로 설계된 행사들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청중들이 내용을 소화하고 생각할 거리를 얻어갈 수 있는 행사를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발표 자료 역시 최대한 한글로 작성할 것을 권장했다. 더불어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에도 청중과 연사가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는 데에 신경썼다.

재원을 마련하다

그렇게 행사의 목적과 구성을 잡고, 전체 행사의 톤에 맞는 연사들까지 섭외하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돈이었다. 태생적으로 디사이퍼는 돈이 없는 비영리 단체다. 물론 돈을 벌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가 정한 방향이었다.

그래서 가진 거라고는 Medium에 쓴 글밖에 없는 상태로 컨퍼런스 후원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내로라하는 국내외 업체에 빠짐없이 연락을 드린 것 같다. 일일이 만나뵙고 다니면서 디사이퍼의 열정과 실력을 팔았고 나에게 이 과정이 디사이퍼라는 브랜드를 머릿속에서 구체화해나가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해시드와 아이콘이라는 굴지의 기업이 가장 먼저 도와주시기로 하면서 다른 기업들도 속속 섭외할 수 있었고 꽤 큰 규모의 행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Shoutout to 해시드, 아이콘, 블로코, 체이너스, 서울대기술지주회사, 언체인, GXC, BRP!)

디퍼런스(DE-FERENCE)를 개최하다

행사가 착실히 준비되어 가다 보니 내부적인 발표의 기준도 굉장히 높았다. 수 차례의 심사와 상호 평가로 발표자들은 몇 주간 잠을 제대로 못 자기도 했다. 나 역시도 컨퍼런스 조직위원장으로서 행사 막바지 준비와 부회장으로서 발표 피드백을 병행하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행사 당일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글로벌 컨벤션 플라자 정문에 서있는 DE-FERENCE 2018 안내판

주말 오전부터 서울대학교 내부에서 열면 사람들이 올까?

행사 시작 직전까지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걱정이었다. 호기롭게 선택한 일정과 장소였지만 노쇼(No-show)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실 노쇼 방지를 위해 참가비도 마련했지만 학생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으로 책정하려다 보니, 막상 당일이 되어 너무 저렴했나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신청해주신 거의 모든 분들이 참석해주셨다. 대강당을 꽉 채운 채 행사가 시작되었다.

대강당을 꽉 채워주신 청중분들
디사이퍼와 컨퍼런스를 소개하는 환영사로 행사를 시작했다.

행사는 크게 2부로 구성하였다. 1부인 Blockchain Core Technology에서는 블록체인 코어 기술의 현주소를 밝히고자 하였고, 2부인 Smart Contract & Token Economy에서는 스마트 컨트랙트의 문제점과 해결책 그리고 토큰 이코노미 디자인 프로세스를 다루고자 하였다.

그리고 각 부가 끝날 때마다 연사들을 앞으로 모시고 청중들과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는 우리 행사가 열리기 3주 전에 열렸던 TXGX 2018이라는 행사를 참고하였다. 사회자와 연사들끼리 사전에 공유된 질문만을 주고받는 재미없는 패널 디스커션이 아닌 실제 청중과 사회자로부터 즉석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주고받는 자리가 정말 흥미로웠기 때문에 꼭 넣고 싶었다.

1부 발표자들과 패널 디스커션 시간. 사회자로서 대답의 부담감도 없으니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행사 도중에 아무도 밖에 있지 않았다.

행사의 진행은 순조로웠다. 디사이퍼 발표자들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잘해주었고, 외부 연사분들 역시 심사숙고 끝에 요청드린 분들인 만큼 재밌고 알찬 발표였다. (Shoutout to 박헌영 블로코 CTO, 김슬기 코드박스 개발자, 류석영 카이스트 교수님!)

무엇보다 뿌듯했던 것은 7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는 컨퍼런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표 도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발표에 경청했다는 점이다. 행사장 앞에 후원사의 부스를 마련해두었는데 후원사 관계자분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들 발표 듣느라 강당 밖으로 안 나와서 부스에 사람이 없어요.”

후원하신 만큼 부스 운영을 통해 얻어가고자 하는 바가 있었을텐데 그만큼 투자수익을 보장하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들어 당황하고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네트워킹 위주의 행사가 아닌 알맹이가 있는 행사임을 증명받는 듯해 내심 기뻤다.

쉬는 시간에는 많은 분들이 부스 앞에서 네트워킹을 진행하셨다.
2부 패널 디스커션에서는 스스로 실제 서비스를 구현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묻는 분들이 많았다.
행사를 마무리하는 김재윤 회장

장장 7시간에 걸친 행사가 김재윤 회장의 폐회사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학회원 모두들 디사이퍼의 첫 번째 컨퍼런스가 나름 성공적으로 끝이 났음을 직감한 것인지 혹은 그저 몇 주간 시달린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잔뜩 상기된 채로 끝을 만끽했다. 나 역시도 2개월 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목표가 별 탈 없이 끝났음에 환호했다.

청중들의 평가

이제 행사에 참석한 청중들의 평가만을 기다렸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해낸 것도 아니었고, 그저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다음 번 도약을 위해 좋았던 점과 부족했던 점을 명확히 알아야만 했다. 미디어에 실리는 기사들과 SNS에 올라오는 후기들을 빠짐없이 확인했다.

“7시간 동안 휴식 시간 20분 외에 계속 앉아있었지만 지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서OO

“몇 십 만원 하는 호텔 행사나 화려한 밋업보다 실속 있고 깊이 있던 행사" — 김OO

“현재를 캐즘으로 언급하는 맥락이 꽤나 있었지만 그 말이 조심스럽게 쓰인 것도 아니었고 또 전혀 우려스럽게 들리지도 않았다. 현실은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미래는 당당하게 고민하는 세션들.. 이런 생경한 리얼리티라니, 이게 디사이퍼가 투자유치나 홍보에 급급한 회사들과 달리 순수 학회이기 때문인지, 혹은 이것이 지금 요 쪽 세상의 공감대인지 나는 멍청해서 잘 모르겠지만, 가장 신뢰감 있는 비비드 컬러로 느껴졌다.” — 강OO

여러 기사들과 후기를 읽을수록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가면서도 호평만 있는 탓에 어깨가 차츰 무거워졌다.

‘다음 번에도 잘할 수 있을까?’

조직의 정비와 다음 디퍼런스의 기약

사실 한 번 잘하는 것은 쉽다. 운이 따르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꾸준히 잘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앞으로 꾸준히 잘할 수 있는 디사이퍼를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은 조직의 체계 없이도 개개인의 열정이 모여 온 방향으로 튀면서 운이 좋게도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는 사람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도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디퍼런스가 끝난 이후로 우리는 조직을 정비하고 있다. 자신이 주목한 문제를 정의하고 함께 이를 풀어나가는 자율적인 연구 단체로서 지속될 수 있도록 말이다. 조만간 9월 초가 되면 디사이퍼와 함께 연구하며 다음 디퍼런스를 준비할 분들을 찾아나설 예정이다.

동아리의 ‘알’을 깨다

이번 행사는 디사이퍼가 기존에 다른 업계에서 학생들이 운영한 동아리가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물론 디사이퍼를 동아리라고 지칭하기는 어렵다. 어느 곳에 동아리라고 등록이 된 것도 아닐 뿐더러, 졸업생과 일반인들이 절반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대개 동아리 즈음으로 여기는 인식을 깨고 나오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우리의 능력보다는 돈이 많이 돌아다니는 시장 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학생 중심의 단체가 블록체인을 연구한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생태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게 블록체인 기술에 집중하고 있는 집단이 부족하다는 것의 반증이라고도 생각한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비즈니스를 하려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여 서비스를 만드느냐가 중요하고, 블록체인으로부터 파생된 영역에서의 사업들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당장 블록체인 기술을 들여다보는 것은 돈이 될지 안될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인 더욱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데에 계속해서 힘쓸 수 있도록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된다.

앞으로 디사이퍼가 서울,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소속과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자율적인 연구 단체로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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