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로컬리티’로 다시 그리는 ‘삶의 지형도’

도시-농촌, 글로벌-로컬, 중심-주변의 대립을 넘어

다크매터랩스
Dark Matter Stories
8 min readSep 29, 2022

--

삶의 지형도 (Geography of Living)’란 개념을 중심 축으로 ‘트랜스 로컬리티(Trans-locality)’를 생각해본다. 도시와 농촌, 글로벌과 로컬, 더 넓게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대립된 개념은 전적으로 20세기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선형적인 경제 성장(linear economic growth) 모델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 삶의 지형도는 탄소 배출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 기능 중심으로 편성돼 있고, 그 결과 도시는 소비 기능, 농촌은 생산 기능으로 분리되고 수출과 수입에 집중된 글로벌 가치사슬에 전 세계 로컬 시장이 좌우되고 있다. 이처럼 선형적 경제 구조는 도시-농촌, 글로벌-로컬, 중심-주변의 대립 혹은 종속 관계를 강화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환경 등 우리 삶의 지형도를 이루는 모든 층위에서 수많은 문제를 연쇄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한편 기술에 힘입어 모든 것의 ‘모빌리티’가 급격히 향상된 상황에서 이러한 지리적 경계가 점차 흐려지고 있다. 사람과 물자는 물론 데이터, 에너지, 심지어 바이러스까지 예측과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여기서 저기로 이동∙확산하는 지금이야말로 ‘로컬 대 글로벌’, ‘내셔널 대 인터내셔널’이란 지정학적 질서에 도전해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삶의 지형도를 그려야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삶의 지형도에서부터 기존의 대립과 분리 중심의 질서가 야기한 문제 상황에 대응한 새로운 제도적 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립 관계를 이루는 영역들을 연결해 삶의 지형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할까? 로컬, 글로벌처럼 서로 다른 스케일을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변화이론과 이 이론을 실천할 혁신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 혁신 역량을 강화할 인프라 시스템, 이렇게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프라는 예컨대 혁신의 성과를 엄밀하게 측정하기 위한 데이터 인프라, 공정하고 개방된 시장을 위한 디지털 인프라, 지속 가능한 공공 자원 관리를 위한 도시 환경(인간과 자연을 모두 아우르는) 인프라, 문제 해결 당사자로서의 시민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시빅 인프라, 공정한 가치 분배를 위한 금융 인프라 등이다. 이러한 인프라와 관련해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

위키스피드(WikiSpeed). 4개국의 개발자 44명이 모여 3달 만에 100 mpg 오픈 소스 자동차를 개발한 프로젝트. 보통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개발하는 데 적어도 5년은 걸리는데, 위키스피드는 온라인 메신저, 화상 통화, 공유 드라이브와 문서 등 오픈 디지털 인프라를 활용해서 3개월 만에 해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시의 ‘파사드 가든(Façade Garden)’. 시민 누구나 집 앞 포장도로의 30cm 남짓한 공간의 보도블록을 드러내 마이크로 정원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해 거리 전체를 도시 정원으로 전환하는 프로젝트. 로테르담 시 정부는 행정 프로세스를 최소화하고 기본적인 규칙과 프로토콜을 공유함으로써 시민들이 직접 마이크로 녹지를 만들어 도시 환경 인프라를 바꿔나갈 수 있도록 했다.

Dev4X. 오픈 이노베이션 기반 엑셀러레이터 플랫폼.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수백만 가지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집단 지성의 힘으로 발전시켜 다음 세대를 위한 시빅 인프라를 구축한다.

이밖에 기후위기와 같이 단일 국가, 단일 도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 도시 어젠다를 설정하기 위해 전 세계 도시들은 초국가적인 거버넌스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EU의 ‘기후중립과 2030 스마트시티를 향한 100개 유럽 도시 연합(EU Mission for 100 climate-neutral and smart cities by 2030)’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인류와 지구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치 체계와 의사결정 프레임을 설정하고, 위기를 맵핑해 관리할 역량을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새로운 인프라를 조성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야 한다.

다크매터랩스는 기술 발전, 기후위기 등 점차 예측 불가능하고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변화에 맞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빅 인프라(Civic Infrastructure)’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사회·경제로 진입하는 초석을 쌓기 위해, 우리는 현상의 기저에 있는, 금융, 규제, 문화, 나아가 거버넌스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dark matter)’을 발굴해 이를 시스템 관점에서 새롭게 설계하고자 한다.

다크매터랩스의 활동은 도시-도시, 도시-국가, 국가-국가 간 경계를 넘어선다는 측면에서 ‘트랜스 로컬리티’ 개념과도 맞닿아있다. 현재 다크매터랩스가 트랜스 로컬리티 관점에서 진행하고 있는 실험 몇 가지를 소개한다 :

시스템 데몬스트레이터(System Demonstrator for new civic assets)

현재 자금 조달 방식은 보통 3~4년 단위의 개별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형태로, 시스템이나 패러다임, 사람들의 사고 방식 또는 문화를 바꾸기 어렵다. 다크매터랩스는 프로젝트 중심의 단기적∙개별적인 접근 방식을 넘어 시스템을 전환하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 실험을 포함한 장기적∙통합적 프로그램인 ‘시스템 데몬스트레이터’를 제안하고 있다. 시스템 데몬스트레이터는 제도, 거버넌스, 데이터, 법률, 기술, 금융 등 시스템의 다양한 층위에 걸친 실험을 통해 탄소 절감부터 공중 보건 개선, 불평등 완화, 일자리 창출에 이르는 변화의 경로를 만들어 여기서부터 예측한 혹은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혜택이 파생될 수 있도록 하는 통합적인 변화의 포트폴리오라 할 수 있다. 이 포트폴리오의 목적은 여러 아이디어를 제시해 일부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아이디어가 연결돼 변화를 위한 하나의 생태계로 작동하고 여기에 관여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협력 관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것이다.

©Permissioning the City

시스템 데몬스트레이터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을 다룬다 : ① 대규모 단위의 주택 리모델링(Retrofit) 및 토지 관리에 관한 ‘공간 정의(Spatial justice)’ ②토양, 나무와 같은 자연 자원을 도시 인프라로 다루는 ‘자연 기반 솔루션(Nature-based solutions)’ ③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놀이’에 기반한 ‘멘털 웰스(Mental wealth)’ 등이다. 이 가운데 현재 영국 글래스고시와 협력해 시범 운영 중인 자연 기반 솔루션 분야 사례를 좀 더 살펴보자.

‘인프라로서의 나무’, TreesAI (Trees As Infrastructure)

TreesAI는 오픈소스 플랫폼으로, 도시 가로변이나 숲의 나무를 조경 요소가 아닌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차세대 도시 자산으로 다루며 도시 숲 관리와 투자에 필요한 데이터 기반 디지털 인프라다. 현재 글래스고에서 진행 중인 TreesAI 프로젝트는 도시 환경 위기 상황 전반을 명확히 파악하기 위한 GIS 기반 위기 맵핑 작업과 이러한 위기를 해결할 솔루션으로서의 자연 자산 규모를 수치화∙측정하는 작업, 나아가 시민·개인·기업·정부가 도시 숲 관리와 조성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와 금융 도구를 개발하는 작업 등을 포함한다.

©TreesAI

TreesAI의 핵심은 거리 규모의 나무 자산 (Micro Civic Assets)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출발해 궁극적으로 도시 전체의 시스템 전환으로 향하는 경로를 설계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거리 규모의 작은 실험에서 시민 참여 프로세스, 제도, 금융, 데이터 거버넌스, 디지털 기술 등의 가능성을 검증한 다음 이를 도시 전체, 나아가 다른 도시로 확장 적용하고자 한다. 글래스고 외에도 케냐 나이로비, 캐나다 몬트리올, 스페인 마드리드, 대구광역시와 TreesAI 도입을 논의 중이며, 각 도시에 적합한 기후위기 대응 전략 포트폴리오를 설계하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도시 간 교류·지식·학습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다.

글 : 강은지(eunji@darkmatterlabs.org)
도움 : 한승희(seunghee@darkmatterlabs.org)

이 글은 지난 19일 월요일 한국리빙랩네트워크와 나우사회혁신네트워크가 ‘트랜스로컬리티’를 주제로 개최한 제11회 과학기술+사회혁신 정책 좌담회를 준비하며 작성한 내용의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좌담회에는 성지은 한국리빙랩네트워크 PD/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좌장), 강은지 다크매터랩스 코리아 대표, 김은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정주 나우사회혁신네트워크 대표, 한선경 씨닷 대표가 연사로 참여했습니다. 좌담회 내용은 관련 기사(링크)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

--

다크매터랩스
Dark Matter Stories

시스템 저변의 ‘암흑물질’에 주목해 지속 가능한 도시 전략을 디자인합니다. kr.darkmatterlabs.org @DarkMatter_La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