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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일

다크매터랩스
Dark Matter Stories
10 min readApr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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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하자마자 ‘일잘러’ 주니어가 되고 싶다면’, ‘지금 배우면 (연봉이) 바뀐다’

SNS를 하다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고 문구다. 이 광고들은 내 일의 전문가가 되고, 일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그걸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기술을 웹 리포트, 인터뷰, 온라인 실무 교육 등의 다양한 콘텐츠에 담아 판매한다. 서점에 가도 일을 잘하는 법과 관련된 자기계발서가 따로 코너를 마련해 진열되어 있다. 책이나 웹 콘텐츠를 사지 않아도, 이런 메시지에 노출되면서 ‘일잘러’[1]가 되는 것, 노력해서 연봉을 바꾸는 것,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 일하는 사람의 미덕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고용이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사회에 살면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노력이 정말 불안을 해소하고, 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안정과 성장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일자리가 주는 고용 안정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을 잘하기 위해 개인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러한 개인의 노력은 우리나라 노동인구 중 25.4% [2]를 차지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어려워보인다. 이러한 개인의 노력은 시간제 근로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긱이코노미 종사자들의 불안함을 해소할 수 없다. 또한 예전의 노동시장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형태의 일을 하고 있는 프리랜서, N잡러 등의 노동자들이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없다. 시대 변화에 맞춰 다양한 일의 형태가 나타나고, 이러한 일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경제와 변화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안정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며 개인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여건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그림 1] 긱이코노미와 SNS에서의 일잘러 문구들

일자리 해법은 ‘ 고용 ’ 중심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여건을 만들어 가는 정부의 정책은 어떤 상황일까. 현정부의 일자리 정책의 의도와 방향을 엿볼 수 있는 사례를 함께 살펴보자. 지난 3월 5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는 당초 목표의 97%가 이행된 수치이다. 하청업체 비정규직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지만, 이는 성과를 얘기할 때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려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2020년에 발표된 ‘한국판 뉴딜 추진 계획’을 보면 2025년까지 총 160조를 투입하여 총 190.1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예정이다. 정책 방향 중 하나로 제시한 ‘안전망 강화’ 부분의 내용을 보면 한국형 상병수당 도입, 국민취업지원제도 도입 등 고용을 전제로 한 지원서비스가 주류를 이룬다. 미래 과제를 해결하는 기업에 대한 투자, 고용을 늘리기 위한 중소기업 육성 계획이 있는 반면, 자영업에 대한 지원은 일자리 정책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림 2] 고용지표와 고용 정책

이렇게 ‘고용’ 중심의 일자리 해법들이 과연 시대의 흐름과 맞는 정책일까? 고용의 틀을 벗어난 다양한 직업들이 탄생하고 있고, 이 직업에 대한 정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 중심의 일자리 정책은 시대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정부든 ‘정규직 증가’와 ‘실업률 감소’ 등 고용에 초점을 맞춘 목표를 세우고 세부 계획들을 운영해나간다. 이는 지도자의 리더십을 실업률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여론의 영향도 한몫할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일자리 정책을 이야기할 때 ‘고용’만을 중심에 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용 시장을 벗어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불안, 드러나는 취약성은 곧 사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 상황에서 전세계가 위기를 경험했고, 이 속에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취약함의 문제를 개인들이 겪어야 했다. 따라서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변화하기 위한 다양한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의 정의를 다시 써야하는 이유

먼저,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왜 일이 구조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 좀 더 깊이 살펴보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일이란 성취감, 성장, 복지, 안정감, 존재감 등을 보장한다. 일이라는 행위가 꽤나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꽤나 합리적인 구조일 수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사회 구성원인 시민이 자신의 필요를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에 문제가 존재한다. 그 구성원이 일을 할 수 없을 때, 또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일이 사회에서 인식하거나 인정하는 형태의 일이 아닐 경우, 사회 구성원으로서 채워야 하는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가의 공적 부조, 사회 복지 체계가 작동하지만, 이 경우에는 ‘일 하지 않고 있음’이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증명해야 한다. 일을 곧 고용(특히 정규직 고용)이라고 생각하는 정부의 정책이나 사회 인식 속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림 3] 20세기 사회계약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 ©Dark Matter labs

이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구조는 20세기적 사회 계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사회 계약이란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 내부에서 통용되는 암묵적 동의라고 할 수 있다.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급격한 도시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종의 20세기적 사회 계약이 등장했다. 이 계약 아래서 기업은 자유롭게 생산하고 이윤을 얻되 사람을 고용해 생활에 필요한 임금을 분배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시민 개인은 먹고 사는 책임을 가지고, 사회가 마련해 준 일자리를 구해 일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이렇게 시민이 고용을 통해 자기 몫의 돈을 벌고, 기업은 생산과 고용을 책임지며 이윤을 얻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결과적으로 국가는 고용될 수 없는 고용 무능력자만 먹여살리는 형태로 계약 관계가 생겼다. 이 계약 관계에서는 주체들이 자기 몫의 책임을 잘 수행하면 시민 모두 자신의 몫을 구해 먹고 살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사회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모두가 회사에 ‘고용’ 되어야 하는 이유가 마련된 것이다.

[그림 4] 20세기 사회 계약의 구조 ©Dark Matter labs

그런데 미래의 일, 새로운 일의 전망을 해야하는 이 시점에서 20세기적 사회 계약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만들어지던 시기와 현재는 계약의 전제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평생 직장이 없었졌다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전제와 21세기의 상황 사이의 간극에서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20세기 사회 계약의 전제와 21세기적 현상의 갈등

20세기 사회 계약은 다음의 조건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계약의 주체는 시민인데, 시민은 가부장 사회 안에서의 남성을 전제한다. 책임질 가족들이 존재하는 성인 남성이 노동자이자 계약의 주체로 역할을 맡는 것이다. 이 시민의 교육은 6세에서 21세까지, 공공이 만들어 놓은 단 한 번의 기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직장에 들어가고, 그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며 직장이 주는 교육과 보험 등의 복지 혜택을 받는다. 이 시민이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동안 노인과 아이의 돌봄은 가정에서 무료로 이루어진다. 평생 다닌 직장에서 퇴직금을 받고 은퇴를 한 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짧은 기간 동안 노후를 보낸 뒤 생을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에게는 최소한의 책임만이 존재한다.

현재와 비교해 봤을 때, 거의 모든 것이 반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전제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 사회 계약의 주체가 되었고[3], 평생 교육을 받아야만 환경에 적응이 가능할 정도로 변화가 빠른 시대에 살고 있다[4]. 고용 안정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종사하는 업계가 5년 뒤에 존재할지 여부도 알 수 없다[5]. 가정에서 무료로 책임지던 돌봄이 더이상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없고, 은퇴한 뒤에 제 2의 인생을 살아도 될 만큼 평균 기대수명이 높아졌다[6]. 이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우리가 이 변화의 한복판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몸은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일을 생각하는 머리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의 일을 하고 있다.

[그림 5] 21세기 일의 변화를 반영할 새로운 사회 계약이 필요하다. ©Dark Matter labs

머리와 몸이 하나가 되어 온전해지는 21세기의 일을 위하여

따라서 일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달라진 전제에서 출발한 일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변화에 맞춰 모두가 안전하고 자기답게 일하기 위한 새로운 계약 조건은 무엇인지, 이를 위해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상상과 시도는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다. 머리와 몸이 따로 각자의 해법을 내놓으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빠르게 달려가는 것보다, 일단 머리와 몸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 같이 달려가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21세기의 일이란 무엇인지, 이에 필요한 계약 조건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글 : 홍진아(hongiina@gmail.com),함주희(juhee@darkmatterlabs.org), 강은지 (eunji@darkmatterlabs.org)

Reference

[1]’일 잘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

[2]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취합한 취업자 대비 자영업자 비율, 2017

[3] 여성경제활동참가율은 49.8%(2011년)에서 52.8%(2020년)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경제활동인구조사」)

[4]전 세계 인력의 14%는 산업이 자동화, 디지털화 및 인공 지능화됨에 따라 재훈련 및 숙련도 향상 교육이 필요로 할 것으로 예상된다. (McKinsey Global Institute, Jobs lost, jobs gained: Workforce transitions in a time of automation, 2017)

[5]2050 년에는 8천5백만 개의 일자리가 기계에 의해 대체되고 9천7백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예상된다. (World Economic Forum, The Future of Jobs Report, 2020)

[6]통계상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2009년에는 80.04세였으며, 2019년에는 83.3세로 추정되어, 10년동안 3.3세 증가하였다. (통계청,「생명표, 국가승인통계 제101035호」)

[그림 1] 출처, 왼쪽 위쪽부터, Szymon Fischer (unsplash), 프로일잘러(유꽃비 저), 이것’ 모르는 프로일잘러는 없다!’ (사이다경제), 변화의 시대, ‘일잘러'의 성장 비법!(토스랩 잔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일잘러 노하우(세바시 대화), 일잘러만의 일잘하는 방법 7가지(출근길 이형), 나는 일잘러일까 일못러일까? (dodukcat), 일 잘하는 사람들에게 배운 5가지 업무 꿀팁(닥치고독서TV), 일 잘하는 사람의 업무교과서(홍종윤 저)

[그림 2]출처, 왼쪽 위쪽부터, 통계청, 공공부문 비정규직 고용개선 시스템, 문대통력, 노동절 맞아 “일자리 더 많이, 부지런히 만들겠다.(서울신문, 2021–05–01),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한국은행 정책목표에 고용안정 포함시켜야”(매일경제, 202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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