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없는 세상이 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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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닥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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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in readJul 6, 2017

술이 극한으로 발전하게 되어 인류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면. 우린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쓸모 없는 계급'에 대해 논하며 가디언즈에 올린 글을 번역했다. 게스트 번역가, ‘안빈낙도웰시코기'의 작품

원문: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7/may/08/virtual-reality-religion-robots-sapiens-book

미래에는 가상현실이 종교와 사회시스템을 대체한다. 인류가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직업 대부분은 수십 년 내 사라질 것이다.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일을 더 잘하게 되면서 사람의 직업을 점점 더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가상세계 디자이너’와 같은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직업들에는 창의성과 유연성을 필수적일 것이라서, 기계에 밀려 실업자가 된 40대 택시기사나 보험판매원이 그런 직업으로 제 2의 삶을 시작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보험판매원이 디자인한 가상세계를 상상해보자!) 보험판매원이 어찌어찌 가상세계 디자이너로서의 실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그 뒤의 10년 동안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그 때 또 어떤 직업이 필요하게 될지는 알 수가 없기에 같은 문제는 또 발생한다.

문제의 본질은 새로운 직업을 만드는 것에 있지 않다. 알고리즘보다 인류가 더 잘해낼 수 있는 일을 찾고 만드는 것에 있다. 아마도 2050년에는, 직업도 없고 새로운 직업을 찾을 수도 없는 새로운 ‘쓸모 없는 계층’이 생길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의 직업을 앗아간 그 기술들은 그들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기초소득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그들을 계속 무언가로 바쁘게 만들고 그 결과로 만족시킬 수 있는가’가 된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무언가가 없다면, 사람들은 미쳐버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쓸모 없는 계층’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해야 할까?

컴퓨터 게임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시간을 3D 가상세계에서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 가상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도 더 즐겁고 감정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사실 이건 꽤 오래된 패턴이긴 하다. 수천 년 동안 수십 억의 사람들이 가상의 게임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왔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상세계의 게임을 수행해온 것이다.

종교가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가상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슬람이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돼지를 먹지 말라’, ‘매일 몇 차례 이상 기도하라’, ‘동성애를 하지 말라’와 같은 가상의 법을 발명했다. 이런 법은 오직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어떤 자연법도 마법의 공식을 반복하거나, 동성애를 금지하거나, 돼지를 먹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무슬림이나 기독교인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상 세계 게임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 살아간다. 매일 기도한다면, + 10점. 오늘 기도를 빼먹었다면 -10점. 죽는 순간까지 충분한 점수를 쌓았다면 사후 세계에 새로운 스테이지로 레벨업 할 것이다. (천국으로 말이다.)

종교는 우리가 ‘선'이라는 포인트를 모으는 ‘현실 속의 게임'이다.

종교가 보여주었듯, 가상 세계는 어떤 박스 안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다. 대신에 실제 세계와 결합해 있을 수 있다. 과거에는 사람의 상상력과 신성한 책들에 의해 이것이 가능했다. 21세기에는, 스마트폰 덕분에 가능하다.

얼마 전 6살짜리 조카 마탄과 포켓몬을 잡으러 나갔다. 우리가 길을 걷는 내내 마탄은 주변 포켓몬을 알려주는 앱을 켜놓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포켓몬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마탄이 노리고 있던 그 포켓몬을 사냥하려 하던 두 어린이와 마주쳤고, 경쟁이 치열한 나머지 거의 싸울 뻔 했다.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무슬림과 유대인간의 갈등과 이 싸움의 유사성이 떠올라,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물리적인 건물이나 돌들의 현실적인 실체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곳에도 (물리적인) ‘성스러움’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스마트북(성경이나 코란)을 통해 본다면, 성스러운 장소와 천사들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종교처럼, 가상 세계의 게임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나 라이프스타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소비주의는 또 하나의 가상 게임이다. 새 자동차를 뽑으면 점수를 얻는다. 비싼 브랜드의 물건을 구매하거나, 해외로 여행을 나가면 점수를 얻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점수를 얻었다면, 우린 이 게임에서 승리했다 말한다.

그 사람들이 자동차를 구입하거나 휴가를 떠나는걸 정말 즐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인들도 마찬가지, 기도하거나 종교의식을 할 때 정말 즐거워한다. 우리 조카도 포켓몬을 잡을 때 정말 즐거워했다. 결국 실제적인 행동은 사람의 뇌 속에서 일어난다.

뉴런들이 스마트폰의 픽셀을 보고 자극받든, 아름다운 바다가 휴양지의 모습을 보고 자극 받든, 마음의 눈으로 천국을 보며 자극 받든, 자극에 차이가 있을까? 모든 경우에서 우리가 찾는 의미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보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건 정말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과학적 지식을 모두 동원했을 때,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언제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그리츠는 저서 ‘딥 플레이 : 발리 사람들의 투계에 대한 메모’에서 발리 섬의 사람들이 투계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붓는지 서술한다. 베팅과 경기에는 신성한 의식이 따라오고, 그 싸움의 결과는 참가자와 구경꾼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

발리 사람들에게 투계는 너무나 중요해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걸 금지시켰을 때, 그들은 체포되거나 벌금을 내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투계를 계속했을 지경이였다. 그들에게 투계는 ‘딥 플레이’였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의미를 투사해 만들어내, 현실이 되어버린 게임이다. 그리고 발리 출신의 인류학자는 같은 의미로 아르헨티나의 축구나, 이스라엘의 유대교에 대한 연구로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스라엘 사회의 한가지 흥미로운 측면에서 우리는 노동이 사라진 세상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일부 초정통파 유대교 사회의 유대인 남성은 절대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애 전부를 성서 연구나 종교행위에 쏟는다. 그들의 가족은 절대 굶어죽지는 않는데, 부인이 돈을 벌어오거나 정부에서 일정수준의 보조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비록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 지원의 의미는 그들이 삶의 기초적인 필요 이상은 항상 충족할 수 있게 해준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정통파 유대교도들

이것이 보편적 기초 소득이 실행된 사례이다. 그들은 절대 일하지 않고 (비교적) 가난하지만, 여러 연구 결과, 반복적으로 이 계층이 이스라엘의 어느 계층보다 높은 행복도를 유지했다. 국가별 삶의 만족도에 대한 글로벌 조사에서도, 이런 ‘실직 상태의 딥 플레이어들’ 덕분에 이스라엘은 항상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올 필요도 없다. 집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10살 짜리 아들이 있다면, 같은 실험을 해볼 수 있다. 그에게 최소한의 콜라와 피자를 제공하고, 부모의 감시나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를 모두 제거해보자. 아마 아들은 며칠 동안 모니터에 얼굴을 붙이고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숙제도 하지 않을 것이고, 방 청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밥도 굶고, 학교도 가지 않고 심지어 잠도 자지 않을 것이다. 아들은 지루함이나 목적의식의 결여를 느낄 가능성이 낮다.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이런 이유로 가상 세계는 포스트-워크 시대의 쓸모없는 계층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가상 세계는 컴퓨터 안에서 만들어질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컴퓨터 밖에서도 만들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 둘의 결합물이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끝이 없고, 아무도 2050년의 딥플레이어들이 무엇을 추구할지 모를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노동의 종말이 삶의 의미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미라는 것은 노동이 아닌 사람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노동은 일부 이데올로기나 라이프스타일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18세기 영국의 시골 대지주나, 요즘의 초정통파 (남성) 유대교도, 온 시대와 문화권의 어린이들은 노동하지 않고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왔다. 2050년의 사람들도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보다 더 복잡한 가상 세계를 만들어내어 한층 심오한 게임을 즐길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현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정말 수십 억 사람들이 환상 속에 빠져들고,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추구하고, 상상의 법을 따르는 세상을 원하는 것일까?

글쎄. 좋든 싫든 우리가 살아온 수 천년의 시간이, 사실 그런 것들로 가득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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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닥늬우스

안전가옥의 집사장. 뉴스를 많이 봅니다. 가끔 번역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