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을 선고받기 전에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슈퍼마켓에 갔다. 뚜렷하게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강렬한 식욕을 느끼지 않아서였을까, 그다지 크지 않은 동네의 슈퍼마켓을 몇 바퀴 돌고 있었다. 마치 궤도라도 있는 것처럼 야채가 있는 코너를 구경하다가 감자에 대해 생각하다가 술과 음료수가 있는 냉장고 앞을 지나면서는 맥주와 막걸리의 맛을 떠올려 보다가 정육 코너에 멈춰서는 1인분의 삼겹살은 누가 정했는지에 대해 혼자서 추적하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교보문고에서 시간을 때우는 일과 닮아 있다. 살 책도 없으면서 문학 서가대 앞에 서서 나쓰미 소세키의 전집 표지 디자인에 대해 혼자 속으로 비평하다가 과학 서가대 앞을 지나다가 로저 펜로즈의 이름을 보고는 언젠가 누가 펫로즈에 관한 책을 출판한다면서 서평을 써줄 수 있느냐고 전화를 걸어온 일을 기억해 내고는 잠시 웃었다. 펫로즈는 키우던 반려동물을 잃는 것을 뜻하는데, 오래 함께 살던 개의 죽음에 관한 책을 곧 출판한다면서 책을 보내줄 테니 홍보용 서평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통화 감도가 떨어졌는지 전화를 걸었던 사람의 발음 문제였는지 내 오른쪽 귀의 청력이 문제였는지 펫로즈를 수학자이자 이론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로 알아듣고는 ‘펜로즈가 개를 키웠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잡지 서가대 앞으로 가서는 종이와 인쇄 그리고 기자들의 인건비를 차례로 생각하며 ‘씨네21’ 같은 잡지의 두께와 크기가 1인분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이리 정처 없음이 갑자기 불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상점의 직원들이 마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였다. 아차, 시간이 없구나. 하니 여러 가지 상념들이 하나둘씩 등을 돌려 나와 단절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해 따져 묻기 시작했다. 도대체 오늘 밤에 뭘 먹을 것인지 말하라고 스스로를 취조하듯 밀어붙였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굳이 하고 싶은 요리도 없었던 그날,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허기를 성실하게 외면하며 잠을 청했다. 그것은 일종의 투정이었다.
투쟁은 아니고 투정이다. 먹고 싶은 것은 없고, 라면은 먹기 싫었으므로, 나는 배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먹지는 않겠다고, 적어도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누워 그날의 정처 없음과 불안을 복기한다. 그러다 얼마 전 사업을 접은 D를 생각하면서, 그러다 일찌감치 어른이 되어버린 주변의 사십대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어쩌면 이것은 삼십대 복판을 지나치다 알아차리게 되는 처지와 깊숙한 관계가 있는 불안일 것이라고 짐짓 생각한다. 어쩔 도리 없이 어른의 삶을 저어야 하는 이들의 사정들을 지켜보고 있다. 어떤 사정은 무어라 보탤 말이 없을 정도로 단단히 처절하다. 생존과 실존의 사이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오 년 정도 지나면 사십대가 될 것이고 사십대의 시간은 어쩌면 마감을 앞둔 슈퍼마켓의 시간과 비슷할까. 아니면 삼십대의 나날들이 어느 정도 결정해 놓은 것들을 가지고 요리해 먹는 시간이겠지. 하며 나는 다시 아무것도 사지 않은 오늘의 불안을 늘어뜨린다. 이런 생각을 이어서 붙이다가 오십대와 육십대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은 오후 아홉 시를 넘긴 시간, 이 글을 쓰는 곳은 카페고, 이 카페의 정적을 깨고 대여섯의 오십대와 육십대가 들어왔고, 그들은 저쪽에 앉아 열심히 떠들고 있다. 가운데에 앉아 대화를 이끄는 사람의 직업은 로만 카톨릭 사제임이 분명하다. 그는 성가대와 노래방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클래식의 진지하고 무거움과 남미 음악의 가벼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막 바로 전 문장에 마침표를 찍으며 닫았을 때 그들은 느닷없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그들이 깔깔거리며 떠드는 사이에 조용했던 카페의 마감이 시작된다. 점원이 나서서 카페를 정리하는 것은 아니고, 카페의 마감이 앞당겨진 것 같은 분위기인데,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이십대 연인들을 나는 바라보고 있노라니 드는 그런 느낌이다. 나는 이것이 아무렇지 않은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문단을 늘리고 있다. 저들의 대화는 어느새 성당 바깥을 향해 나가 아무런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늙은 사제는 원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깔깔거리고, 그러다 갑자기 젊은 애들은 죄다 아이폰을 쓴다는 결론을 내리다가 이제는 지문 인식의 불편함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중이다. 그러다가 사제는 식복사가 해주는 밥을 그냥 먹게 된다 말하고 누군가는 며느리가 해준 밥을 그냥 먹게 된다는 대꾸를 한다.
머지않아 어른을 선고받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어른을 집행 중인 이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 받은 종신형 선고문을 문득 다시 꺼내 읽으면서, 아주 천천히 슬픔이라는 것을 쓰다듬고 있다. 더 이상 몸속 어디에서도 세포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때가 찾아와야만 끝날 이 형벌의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이다. 과연 어른이라는 것을 선고받은 이후로 언제까지 실존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해보고 있다. 슈퍼마켓에서 얇게 썬 소고기 채끝살을 반 근 정도 샀다. 집으로 돌아와 채끝살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냉장고에 넣어둔다. 한 시간 동안 빗자루와 걸레로 청소를 했다. 구석구석에 먼저 자살한 머리카락과 피부의 편린들을 모아서는 오 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오 리터짜리 쓰레기봉투는 미리 주어진 유골함일까. 그러다 냉장고에 넣어둔 소고기를 꺼낸다. 핏물을 버리고 스테인리스 보울에 계란 네 개를 풀었다. 두 개는 통째로, 두 개는 노른자만. 그래야 계란옷이 먹음직스럽게 노란빛을 띤다. 거기에 소금을 두 번 꼬집어 넣고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을 어떤 향신료를 집어다 넣었다. 나에겐 절대로 며느리가 없을 것이므로, 이건 아마 나의 죽음 이후에도 풀리지 않는 비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부침가루를 입힌 소고기를 계란에 충분히 적신 후 잘 달군 팬에 하나씩 시차를 두고 올린다. 하나를 뒤집을 시점에 다른 하나를 올리는 식의 시차다. 그러면 태울 일이 없다. 하나를 올린 후엔 미리 어슷 썰어둔 홍고추를 세 개씩 올려둔다. 핏물이 살짝 올라오면 뒤집을 시간. 그렇게 나는 정성껏 소고기 육전을 만들었다. 지난주에 간장에 조려둔 삶은 계란을 냉장고에서 꺼내 작은 접시에 담았다. 오늘은 이렇게 시위를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