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게 뭘 바라?

최황
사회계발
5 min readSep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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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늑대로부터 시작해 개라는 종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얼마나 다양한 종을 만들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었을지 모른다. 그 결과 개는 가장 다양한 아종을 가진 종이 되었다. 가장 작은 치와와부터 가장 커다란 아이리시 울프 하운드 사이에는 수백 종에 달하는 개들이 있는가 하면, 종간 교차 번식을 통해 생겨난 교잡종, 즉 똥개도 수두룩이다. 이렇게 다양한 종의 개는 저마다의 역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독일산 셰퍼드는 군견으로서의 임무를 위해 만들어졌고 요크셔 테리어는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인기있던 종으로, 쥐로부터 집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기의 개들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는 풍경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물가에서 사냥한 오리를 회수하도록 만들어진 골든 리트리버를 보면 알 수 있다. 적어도 우리집에서 녀석이 하는 일은 이따금 용납 가능한 선에서 말썽 부리기와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함께 식사할 것을 주장하기와 공원으로 나가자고 보채는 것이다. 녀석을 통해 가족이 얻는 심리적 육체적 이득을 경제적 가치로 계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분명히 밥값 이상의 존재감을 떨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평일 저녁이든 주말 오전이든 녀석과 함께 집 근처의 공원으로 향해 적어도 한 시간은 걷는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최소한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좋은 삶’의 계기와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이 현장에 엉뚱한 사람들이 관여하려 든다는 거다. 녀석과 길을 걷는데 느닷없이 다가와 만지는 것은 예삿일이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포함될 수밖에 없는 사진을 거리낌 없이 촬영하거나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데려와 나와 녀석을 멈추게 만들고는 한 번 가서 만져보라는 부모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이렇게 큰 개를 왜 공원에 데려오느냐는 식의 시비를 걸거나 내가 개똥 봉투를 가지고 다니는지를 다짜고짜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왼손엔 유모차에 앉은 둘째로 보이는 아이를 끌고, 오른손에는 첫째로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서 나와 녀석의 뒤로 달려와 두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게 만든 남성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내가 불쾌함을 드러내자 남성은 곧장 얼굴이 붉어지더니 되려 내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 화의 뒷편에는 무안함과 섭섭함과 창피함이 뒤섞여있었다. 또 어떤 예비 부부는 공원에서 웨딩 촬영을 하다가 뛰어와 녀석을 빌려달라고도 했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 면전에 수 초 동안 정지시켜 똑바로 보게끔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헛웃음이 나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 적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공원에 데려온 예쁘거나 멋지거나 귀여운 모습의 개는 아무렇게나 즐길 수 있다거나 공원이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공공장소에 입장한 모든 사람에게 쉽게 관여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와 나의 개는 그들 혹은 당신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녀석의 목에 줄을 걸고 오직 둘만의 관계와 둘만의 역사와 둘만의 이야기와 둘만의 이유와 둘만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걸을 뿐이다. 이건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물론 사회와의 관계나 시대-문화적 관계도 있다. 나는, 혹은 당신은 나와 녀석과의 관계와 삶을 통해 인간과 동물, 사람과 개, 확연히 언어가 다른 두 존재, 주인-강자로서의 위치, 공원의 미래, 도시라는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의 비둘기와 고양이 따위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선택의 문제다. 공원이라는 장소가 주어졌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타인의 시공간에 침범할 상태가 되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종종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상에서 캔버스에 점 하나 찍은 그림이나 마구잡이식으로 아무렇게나 이해할 수 없는 색을 칠한 그림이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을 본다. 예술-미술은 대중과 너무 멀고, 그래서 어렵게만 느껴질 뿐이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그런 예술-미술 작품이 수천만 원 혹은 수억을 넘어 수십, 수백억 원에 거래되는 것은 자본가의 돈세탁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 예술이란 자고로 어때야 한다거나 예술가의 역할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두 틀린 이야기다. 이런 말들은 비평의 범주에 속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지적으로 게으른 소리다. 이 글을 통해 왜 피카소가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에 관한 미술사적 맥락을 설명하거나 이우환이 어쩌다가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게 됐는지에 관한 미학적 해설을 하지는 않을 거다. 예술은 예술이 존재해온 방식을 샅샅이 파악하며 분열하고 새롭게 존재할 방식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시대와 사회를 읽어내고 예측하고 실험을 전개하고 성패를 평가한다. 이 일련의 일에 당신의 미적 경험이나 미학적 가치관을 염두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순수예술이란 미적 감정이, 미만한 사회적 시대적 기준과 표준들로부터 추상하는 개인적 판단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의 예술적 지위 논쟁을 두고 말한 것처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지를 재단하는 일차원적 시도가 아니라, 이런 개인적 추상 판단의 인정이 이 세계를 얼마나 풍부하게 바꿨는지에 관한 논의다. 그리고 당신에게 그런 논의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기실, 예술 자체보다는 미술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에게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주어졌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예술의 시공간에 침범할 상태가 되었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여전히 예술은 당신의 미적 판단과 미학적 경험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도 있고 마돈나도 있고 심지어 존 케이지도 있지만, 그들이 당신의 취향과 공감을 위해 존재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예술이 당신의 공감을 이끌어낼 것인지의 여부는 완전히 예술가 개인의 선택의 문제 혹은 순전히 우연의 문제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 우연에 대해 감지하지 못한다. 지적으로 너무 게으른 탓이다. 어떤 예술가가 냉혹하고 강철같은 현실을 모른척 하면서 캔버스에 점이나 하나 달랑 찍고는 예술이라고 우기고 있노라는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그게 누구고 작품 제목이 뭐고 언제 그렸는지 까지는 함께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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